제시문 |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어.”
슬픔의 보금자리.
라헬은 자기 집을 그렇게 불렀다. 바닷가 언덕에 지은 높고 푸른 지붕에 온통 하얀 집은 맑은 날에는 찬란했지만 흐린 날, 비바람 치는 날이면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처럼 위태롭고 과묵해 보였다. 라헬은 자기 집을 그렇게 불렀지만 집에 대한 긍지가 남달랐다. 가장 최근에 손본 구석의 회칠까지 라헬의 집은 그 자신과 자식들, 남편과 온가족의 수고가 깃들어 있다. 라헬은 이 긍지 높은 집의 선장이었다. 기쁜 일이나 궂은 일이나 주저없이 나서서 지휘했고, 그것은 전쟁터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북소리, 병사들을 북돋는 지휘관의 함성 같았다. 라헬은 가족들을 이끌어 갖은 고난을 이겨내 매번 더 나은 고지에 섰다. 여덟 자녀는 모두 훌륭히 자랐고 라헬은 볼일이 없어도 시장에 나서길 즐겼다. 모두의 칭송과 부러움의 눈길, 감사와 축하의 인사가 그녀의 것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
전쟁이 터지자 그의 아들들은 전장으로 나갔고 모두 명예롭게 숨졌다. 사실 라헬의 막내는 크지 않은 부상을 입고 비위생적인 병동에서 감염돼 억울하게 죽었지만 국가는 그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라헬과 딸들은 다시 남편이자 사위, 그들의 기쁨이던 젊은이들을 모두 잃었고, 일감을 찾아 그리고 슬픔의 집을 벗어나기 위해 타지로 떠나갔다. 모두가 품에서 날아가 버리고 라헬만이 높고 푸른 지붕에 온통 하얀 집에 남아 죽음을 기다렸다.
딸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를 찾는 손주는 없고 딸의 아이들은 다른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고 있다. 이 집에서 라헬은 세상에 오직 좋은 것만을 길러 바쳤지만, 세상은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자식들의 품위까지 도맡은 하릴없는 여생을 선물했다. 그래도 라헬은 집을 돌보고 몸가짐을 살펴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려 애썼다. 간혹 지나는 사람들이 찬탄하면 비록 귀가 어두워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표정을 읽고 환히 웃어 주었다.
“슬픔의 보금자리야. 썩을 것. 죽음이 여기를 아껴서 나를 데려가지 않는다니까. 내가 없으면 빛을 잃을 줄 저도 아는 거지. 오래 묵어서 약기만 해. 끌끌.”
내가 들은 그녀의 마지막 음성은 혀 차는 소리였다. 사흘 뒤 찾아오기로 했는데,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라헬의 부음을 들었다. 라헬이 남긴 편지가 며칠 뒤 전해졌는데 그 모든 걸 그대로 유지시킨다면 그 집은 나의 것이라고 했다. 딸들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고맙다며 서둘러 떠났다. 나는 흰 집의 주인이 되어 밤마다 항해를 떠난다. 아름답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꿈들. 몇 달이 지나면서 라헬의 유품들을 정리하다 꿈 속에서 본 소년소녀들을 만났다. 그들은 건장한 청년이 되었지만 더 늙지는 않았다. 그들은 밤마다 찾아와 울거나 웃다가 떠난다. 라헬만은 거기 없다.
슬픔의 보금자리.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어.”* 작게 중얼거리며 라헬이 앉던 흔들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어.”
― 에우리피데스Euripides 비극 <메데이아Medeia> 속 이아손의 대사.
제시문 |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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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 사항 | 400자 원고지 노트에 만년필로 수기(手記) 작성, 총 21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