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력과 습력 대신 원력으로 바꾸기, 초월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업력(業力)과 원력(願力)을 이야기하고,
둘 사이 습력(習力)도 이야기합니다.
업은 카르마요, 지난 삶에서 쌓이고 남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저마다 이끌리는 것이 있고, 편안한 것이 다 다릅니다.
갑에게 약이 을에게 독인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기도 하답니다.
현생에서 자꾸 거듭해서 기운 것이 습입니다.
고승들이 깨달음에 대해 설할 때, 깨치고도 맨마지막에 버리는 것, 벗는 것이
습이라고도 합니다.
습은 몸이 아닌데 몸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행동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게 그사람이 됩니다.
업력도 습력도
우리에게 욕심(慾心)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대개들 욕심을 줄여라, 욕심을 버려라 타이릅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고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 애써 봅니다.
십중팔구는 실패합니다. 아니면 제 풀에 때려치운지도 모릅니다.
아니.
당신은 욕심이 너무 작습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겁니다.
몸보다 큰 수레를 뜻대로 끌 수가 있겠습니까.
몸집을 키워야 합니다.
욕심을 더 키우십시오.
부분에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왕 일어난 마음을 수습하려 해도
기체처럼 제약 없이 커진 마음은
눌러 봐야 유체로 변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급류를 이뤄 당신의 혼을 빼 놓을 뿐
다스려지지도, 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미 겪어 보았을 터
난감하여 부끄러움 아니면 뻔뻔스러움으로
달리 말해 겁과 비겁 양극으로 내어쫓겼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추방. 유배.
일어난 마음을 차라리 더 부추기십시오.
부축여서 ‘더, 더, 더, 더’ 외치십시오.
키우고 키우다 보면
모순되고 상극으로 보이던 것들이 만나고 통하고 하나 되는 걸 보게 됩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더 바라십시오.
더 바라십시오.
한껏 욕심을 부리십시오.
고래(古來)로 쾌락주의가 금욕으로 현실한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
당신이 그 목록에 더해지는 건 이상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전부(全部)를 바라기.
일부(一部)를 바라지 말기.
그러려면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당신의 자연주의는
초월[超越, (독)transcendental트란첸덴탈]과 합일하고 말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不可避불가피].
하나의 자연이 바로 그 하나의 자연이기 위해서
그것을 그렇게 잡아 주는 것이 초월입니다.
당신의 욕심이 타협하지 않고
옛적 씨앗과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능한 모든 미래를 망라하여
보편타당한 데 이르도록,
자리이타(自利利他)하도록
크게 마음 먹고
크게 욕심 내기를.
이 얼마나 복됩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것을 더하여 완성하고
우리는 그 그늘과 열매를 누리고. 얼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