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월 Feb 21. 2024

우리는 믿기를 선택했다

— 우리 종의 선택

우리는 믿기를 선택했다

— 우리 종의 선택



인류는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 해석으로는 

나무를 타던 작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 

그렇다고 원숭이 사촌이란 말이 되진 않는다. 

그들은 우리랑 아예 갈라져서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까. 


인류를 다른 특별한 종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작은 

뇌 용량이라던가 

손의 사용 같은 것보다 더 먼저 

눈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야생동물들은 

눈동자가 아주 크다. 

짙은 눈동자는 흰 눈자위를 남기지 않고 

꽉 채우고 있다. 

때문에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기 어렵고 

그 눈빛을 헤아리기 어렵다. 

야생에서 

작은 상처나 부상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냉혹한 상태에서 

‘나를 들키지 않는 일’은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었으리라. 

지금도 거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다. 


오래전 

나무원숭이의 일종이 

눈의 밝은 부분을 늘리고 어두운 부분, 다시 말해 빛의 수용체 면적을 줄였다. 

이로써 그는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됐다. 

새끼를 숨기고 싶어도 

그 위치를 들키고 

일껏 허세를 부려도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음을 금세 들켰다. 

무엇을 바라는지도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낱낱이 까별려졌다 — 스스로 그렇게 까발렸다.


인류의 조상은 

이로써 한없이 취약해진 대신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모두가 똑같은 것을 똑같이 쌓아올리는 데서 탈피했다. 


생물 종 가운데 특이하게도 

자기 목숨을, 생의 조건을 ‘타자’로 삼았다. 

이웃의 선의가, 호의가 

자신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게 하였다. 

자신을 남에게, 타자 혹은 나아가 원수, 아니면 

아니면 

이웃에게 

의탁하였다. 


인류는 이웃에 의지하였다. 

타자를 믿기로 했다. 


이 근본 선택은 

인간만이 높은 문명을 이룩하게 하였다. 

어느 것이 더 존엄한지는 몰라도 

저마다 모든 것을 두루 다 챙기지 않고도 

자기 에너지 대부분을 어느 하나에 집중 투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도 삶을 영위하는 게 가능해졌다. 

복잡성이 증대할수록 이는 상호의존성이 더 고도화됐다는 것, 더 민감해졌다는 것을 뜻하였다. 

우리는 많은 걸 누리지만 

스스로 만들지도, 고치지도,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걸핏하면 ‘전문가’를 불러 손본다. 

자신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의 전문가로서 나아가 일한다. 

우리는 스스로는 지금 자신이 누리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담보하지 못하지만 

서로 도우면서 

가장 좋은 것들의 조합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이는 거의 기적과 같다. 



이 기적의 밑바탕에는 

그러나 한 가지 선행된 요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모여 살게 하고 

서로 의지하게 한 

자연에서 달리 찾을 수 없는 특별한 방식을, 

그러나 자연 또한 전체로서는 완벽하게 구가하고 있는 그것을 

매우 압축하고, 선택적으로 고르고 다지는 

이 방식을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능력, 사회적 소양은 

이 약속이 계속된다는 기초 약속이고, 전제이고, 연료이다. 

능력을 만드는 조건이다.

조건을 바꾸는 능력이다. 



우리는 믿기로 했다. 

강한 팔뚝과 매서운 부리, 발톱 대신에 

스스로 모자란 것을 

서로에게서 구했다. 

그러기 위해 자기 조건을 드러내서 


모자람을 모아서 빼어남을 만들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취약하기 그지없는데 

집단은, 사회는 찬란하고, 두렵기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믿기를 선택했다. 

의심하거나 

위협하는 대신 

홀로 날카롭게 경계를 서는 대신 

등을 맡기고 

배를 드러내고 

생존을 의탁하였다. 


우리는 다른 존엄을, 다른 삶의 방식을 낳았다. 


그러니 

간혹 배신당하더라도 

믿자. 


자잘하게 어떻든 

크게는 믿자. 


믿어서 무언가의 진짜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이렇게 배워서 다음에는 더 속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기로 했다. 

우리 종의 선택이다. 


그러나 개인은 매양 다시 

평생동안 반복해서 다시 결단하여야 한다. 

만일 누군가 영원한 결단을 내린다면 

그는 또다른 의미로 

신이다. 


그러나 괜찮다. 

인간인 것으로 충분히


눈부시다. 


너를 믿어서 

나는 

우리와 이어진 [즉, 인간인] 

내가 되었다.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마태오복음 14장 28절; 요한복음 6장 20절) 



……


겁에 질린 그대여, 

두려워 마십시오. 


……







이전 08화 공동체의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