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있다고 믿게 할까?
흔히 교육에서는 '믿음'을 중시한다.
맞다.
교육은 단일 주체가 단일하게 행동하고 행위의 값을 지지 않고
가르칠이와 배울이가 있고, 여기에 개입하는 주변동료(peer groups), 가정-지역 등 주변환경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동료 그룹은 사실 배울이 주변, 가르칠이 주변에 있고,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동료들이 있어서
이들이 배울이의 배움과 자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사실 전지구가 하나의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으며
오직 그 사이 놓인 우연한 갖가지 사건들만이 개별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흩어진 그것들은 독립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당기고 풀며 정말 제대로 엮여 있다, 동일주체로서 동일한 운명을 지닌다.
걷는 사람의 두 발이 앞설 때도 있고 뒤쳐질 때도 있고, 서로 엇갈리거나 모이고 갈라서기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의 전체인 사람으로 보자면 단지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일 행위의 각 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낱낱이 서로를 보면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전체 안에서는 분명하게 예측되고, 아무런 혼동할 것 없이 단순하고 명료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모르는 건 전체인 것이다.
부분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쥐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감쌀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를 보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지 불가능을 파훼하는 것이
인지의 눈을 감고 보는 것, 바로
믿는 거다.
알지 못하는 데서 더 나아가려면
여태 만사를 밝히 보던 그 눈을 감아야 한다, 어두운 눈이 아니라 밝은 그 눈을.
그리고
감고서 보아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보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배움의 주체는 공동주체이기 때문에
동일성과 차이성을 모두 갖는다.
둘이 서로만을 대해서는 어긋나고 엇갈리는 걸 피할 수 없다.
무엇을 주장하든 서로를 다치게 하고
서로를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자신을 부정하든지.
그러나 둘을 포함한 전체를 보면
방향이 보인다.
그래서, 내가 그를 믿는다 치자.
그는 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사실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우리는 늘
모르는 것을 '함'으로써 '하다가' 알았다.
잘못 안 것을 고쳐 알았다.
걸을 줄 모르는데, 잘 배우고 잘 알아서가 아니라
배운대도 그걸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하면서 알게 됐고,
뭔가 뾰족하게 알지 않아도
그 '함'에 일치하여 그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 우리는 무엇을 왜 믿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아는 게 그치는 데서 믿기 시작하고
믿는 게 그치는 데서 알기 시작하고
이를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하였거니와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둘이서 그냥 하나여서 그런 거다.
둘이 그냥 같이 간 거다.
그대는 어떻게 믿음을 얻을까 고민하지 마라.
그보다는 그대가 진정으로 믿기 위해 힘쓰라.
거기에 어떤 정직과 용기가 필요한지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지
하면서 배우고, 배우면 또 하라.
이 지와 행의 순환은
그대가 무엇을 믿는지
상대가 알게 한다.
아니, 느낀다.
상대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대를 믿을지 말지 결정할 것이다.
그대가 상대를 믿으면
상대는 그대를 더 잘 느낀다.
그뿐이다.
무슨 특별한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면 진실인 만큼 전해진다.
전해받는 쪽 또한 진실하면 진실한 만큼 쪼개지고, 열린다.
그대는 무감각과 무감동, 무반응을 견딜 것이다.
그러나 상대도 그대와 같은 사막을 건너고 있다.
그는 쪼개지는 괴로움을 열려서 안이 열리고 메마르고 따갑고 변해 버리는 그 전부를 견디고 있다.
먼저 믿는 쪽이 그래도 고통이 적다.
먼저 믿는 쪽은 자기 고통을 더 잘 알 뿐이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믿음을 받고, 뒤늦게 믿는 쪽은 더 크게 괴롭다.
둘이 하나가 되려 움직이는 거리는 언제나 저쪽이 더 멀고, 언제나 저쪽이 더 급하다.
그러니까 믿는 것을 손해 보듯 여기지 말 것.
그저 믿을 것.
더 잘 믿을 것.
그게 본래 잘 되는 게 아니니까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 믿었다면
내 존재를 믿고-믿지 않는 선(線)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기어라.
몸을 넘기듯
마음을 넘기라.
정신이 여기 아니고 거기 살게 하라.
그러면 당신이 믿는 것은 사실이고,
이 사실은
나머지 모든 일을 압도하는
분명한 것이 된다.
배가 등대로 올 것이다.
등대는 배로 갈 것 없다.
배가 고초가 클 터이니
배를 응원하라.
배에게 등대의 외로움, 기다리는 어려움을 호소하지 마라.
배는 오거나 가거나
평탄한 바다를 건너도 힘들고
거친 바다를 지나려면 더 힘들다.
부모나 교사, 형이든 아우든
누군가 다른 이가 배우도록 하는 이는
배우기를 바라는 이는
먼저 자신이 등대가 되기를,
믿고 기다리기, 환하게 견디기를
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태워야 한다.
기꺼이 견디며
상대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이것이,
희망을 거스르는 희망이며.
우정이 태어나는,
세대를 건너고,
종과 지역, 이념, 그밖의 모든 것을 건너 잇는 끈이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