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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Apr 18. 2024

어떻게 믿을 것인가

— 믿고 있다고 믿게 할까?



흔히 교육에서는 '믿음'을 중시한다. 

맞다. 

교육은 단일 주체가 단일하게 행동하고 행위의 값을 지지 않고 

가르칠이와 배울이가 있고, 여기에 개입하는 주변동료(peer groups), 가정-지역 등 주변환경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동료 그룹은 사실 배울이 주변, 가르칠이 주변에 있고,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동료들이 있어서 

이들이 배울이의 배움과 자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사실 전지구가 하나의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으며 

오직 그 사이 놓인 우연한 갖가지 사건들만이 개별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흩어진 그것들은 독립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당기고 풀며 정말 제대로 엮여 있다, 동일주체로서 동일한 운명을 지닌다. 

걷는 사람의 두 발이 앞설 때도 있고 뒤쳐질 때도 있고, 서로 엇갈리거나 모이고 갈라서기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의 전체인 사람으로 보자면 단지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일 행위의 각 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낱낱이 서로를 보면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전체 안에서는 분명하게 예측되고, 아무런 혼동할 것 없이 단순하고 명료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모르는 건 전체인 것이다. 


부분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쥐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감쌀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를 보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지 불가능을 파훼하는 것이 

인지의 눈을 감고 보는 것, 바로 

믿는 거다. 


알지 못하는 데서 더 나아가려면 

여태 만사를 밝히 보던 그 눈을 감아야 한다, 어두운 눈이 아니라 밝은 그 눈을. 

그리고 

감고서 보아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보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배움의 주체는 공동주체이기 때문에 

동일성과 차이성을 모두 갖는다. 

둘이 서로만을 대해서는 어긋나고 엇갈리는 걸 피할 수 없다. 

무엇을 주장하든 서로를 다치게 하고 

서로를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자신을 부정하든지. 


그러나 둘을 포함한 전체를 보면 

방향이 보인다. 


그래서, 내가 그를 믿는다 치자. 

그는 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사실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우리는 늘 

모르는 것을 '함'으로써 '하다가' 알았다. 

잘못 안 것을 고쳐 알았다. 

걸을 줄 모르는데, 잘 배우고 잘 알아서가 아니라 

배운대도 그걸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하면서 알게 됐고, 

뭔가 뾰족하게 알지 않아도 

그 '함'에 일치하여 그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애초 우리는 무엇을 왜 믿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아는 게 그치는 데서 믿기 시작하고 

믿는 게 그치는 데서 알기 시작하고 

이를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하였거니와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둘이서 그냥 하나여서 그런 거다. 

둘이 그냥 같이 간 거다. 


그대는 어떻게 믿음을 얻을까 고민하지 마라. 

그보다는 그대가 진정으로 믿기 위해 힘쓰라. 

거기에 어떤 정직과 용기가 필요한지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지 

하면서 배우고, 배우면 또 하라. 

이 지와 행의 순환은 

그대가 무엇을 믿는지 

상대가 알게 한다. 

아니, 느낀다. 


상대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대를 믿을지 말지 결정할 것이다. 


그대가 상대를 믿으면 

상대는 그대를 더 잘 느낀다. 

그뿐이다. 

무슨 특별한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면 진실인 만큼 전해진다. 

전해받는 쪽 또한 진실하면 진실한 만큼 쪼개지고, 열린다. 


그대는 무감각과 무감동, 무반응을 견딜 것이다. 

그러나 상대도 그대와 같은 사막을 건너고 있다. 

그는 쪼개지는 괴로움을 열려서 안이 열리고 메마르고 따갑고 변해 버리는 그 전부를 견디고 있다. 

먼저 믿는 쪽이 그래도 고통이 적다. 

먼저 믿는 쪽은 자기 고통을 더 잘 알 뿐이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믿음을 받고, 뒤늦게 믿는 쪽은 더 크게 괴롭다. 

둘이 하나가 되려 움직이는 거리는 언제나 저쪽이 더 멀고, 언제나 저쪽이 더 급하다. 


그러니까 믿는 것을 손해 보듯 여기지 말 것. 


그저 믿을 것. 

더 잘 믿을 것. 

그게 본래 잘 되는 게 아니니까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 믿었다면 

내 존재를 믿고-믿지 않는 선(線)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기어라. 

몸을 넘기듯 

마음을 넘기라. 

정신이 여기 아니고 거기 살게 하라. 


그러면 당신이 믿는 것은 사실이고, 

이 사실은 

나머지 모든 일을 압도하는 

분명한 것이 된다. 


배가 등대로 올 것이다. 

등대는 배로 갈 것 없다. 

배가 고초가 클 터이니 

배를 응원하라. 

배에게 등대의 외로움, 기다리는 어려움을 호소하지 마라. 

배는 오거나 가거나 

평탄한 바다를 건너도 힘들고 

거친 바다를 지나려면 더 힘들다. 


부모나 교사, 형이든 아우든 

누군가 다른 이가 배우도록 하는 이는 

배우기를 바라는 이는 

먼저 자신이 등대가 되기를, 

믿고 기다리기, 환하게 견디기를 

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태워야 한다. 

기꺼이 견디며 

상대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이것이, 

희망을 거스르는 희망이며. 

우정이 태어나는, 

세대를 건너고, 

종과 지역, 이념, 그밖의 모든 것을 건너 잇는 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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