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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Apr 04. 2024

두 개의 주체

— 지성과 의지



지성과 의지에 대한 담론은 낯설지 않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으로부터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을 통과하며 흐르는 

큰 사상의 물줄기에서 

일찍부터 철학자들은 

앎의 주체로서 지성과 

선(善)의 주체로서 의지가 

함께 한 인간의 성격을 통합, 형성하고 

이로써 직업 기술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을 형성하고 

문명과 국가를 형성하는 

교육이 

정의와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개념하였다. 


동양에서도 공맹의 도는 

교육이 수신(修身)으로부터 치국(治國)하고 널리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데 이른다[평천하(平天下)] 일렀다. 

이런 확신은 명철한 앎이며, 실천이었고 

공부하는 자들이 

마땅히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공부가 부족하면 천하에 나가지 않았고 

공부가 차면 때를 만나 출세하거나, 때가 어긋나면 물러나 은거하기도 하였다. 

도학에서 선비의 이상인 군자는 통합된 성격의 인격자인 동시에 

훌륭한 치세를 펼 경세가이다. 

따라서 왕이라면 성인(聖人)이 되려는 성학(聖學)을 배우고 행한다. 


이 도리는 교육이 정의와 깊이 연결됨을 보여 준다. 


인간정신에서 이성을 남달리 좋은 것으로 구분짓고 

이 이성을 봉성스bon sens(불어), 굳센스good sense 라고 부르며 다른 외부와의 관계성을 끊고 

인간이란 기계 장치에 내재한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이성은 마침내 정의나 목적과 분리된 것이 되었다. 

내재하기만 하는 것은 외부를 갖지 않는다. 적어도 주고받아 자기를 변화하는 관계성을 갖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경계 짓는 순간, 인간 이성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착각 아래 

변화의 힘을 상실하고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비체(卑體, abject)로 떨어진다. 


이 새로운 이성은 공리주의라는 실용적 노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 학교는 물산회사와 같고 

교사는 직장인이며 

부모는 치른 대가에 상응하는 재화를 서비스받기를 바라며 

교육을 쇼핑한다. 

공교육조차 그러한 자본의 가치를 채워 주는 데 비례하여 효용을 인정받는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스스로 상품이 되고 있다. 

부모는 아이들의 인격을 살리는 대신 

상품으로서 팔리는 가치를 갖추게 하는 데 절치부심한다. 


지나친가? 


이 모든 배움은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설을 비웃는다. 

지행격차(Knowing-Doing Gap)는 당연시되고 

배움은 어디까지나 물질세계에서 교환할 상품권이다.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종종 [[지와 사랑]]으로 번역되었고, 

제목과 내용이 상응하여 공감과 함께 고민을 안겨 준다. 

둘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둘은 어긋나는 것인가? 


좀 더 확신에 찬 선배들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둘 사이의 우위를 분명히 하고 있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러고 나서 원하는 바를 행하라. 


먼저 사랑하고, 

사랑하므로 배우는 것이 

사라진 의지, 

배움에 나아가 삶 전반에 무기력한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가르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먼저 사랑하고, 

그런 다음 다른 원하는 것들을 행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은 채로나 

사랑이 모자란 채로는 

성급히 다른 일을 도모할 게 아니다. 

어려울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면? 

어렵기만 할까?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질까?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엔 뜻대로 하는 것. 


이게 그렇게 

어렵거나 

못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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