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불을 느낀다 (남정국 시)

by 이제월


불을 느낀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침내 가슴으로 쳐들어가는

결심하는 자의 망설임

그의 광기(狂氣)를 듣는다.


― 남정국, 『불을 느낀다』, 엠엔북스, 2024, 34.



남정국 시 「불을 느낀다」(1978년 3월) 전문입니다.


시인은 세상이 그를 알기도 전에 스무 살 청춘을 두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들은 그와 그의 글들을 버리지 못했고

지난해 갈무리하여 사후(死後) 시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이 짧은 시는

시의 탄생을, 시인이라는 현상(現象 또는 顯象, 고대 그리스어: φαινόμενον, 영어: phenomenon)을 웅변해 줍니다.

이런 정도로 뼈를 드러내며[노골(露骨)*] 시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해설자의 해설이야, 산문이야 늘 있어 왔지만

시를 시로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해의 젊음은, 동시에 결코 오지 않을 그리하여 그의 생을 추월해 버린 만년(晩年, 늘그막을 뜻하지만…)은 이런 혜안과 표현을 불을 뿜듯(위로) 폭포가 쏟아지듯(아래로) 쏟아냈습니다.

위와 아래를 잇는 이 시구들은 단순한 일상의 말들을

시어(詩語)로서 어떻게 빚어내고 있을까요?


발끝과 머리끝, 그리고 마침내 가슴은

존재의 단락과 층위/위계까지 한꺼번에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그것들을 순서로 ‘에서’, ‘까지’, ‘마침내'로 서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발끝 즉, 감각입니다.

감각은 외부를 향하고, 외부세계를 가감없이

이 창을 통과할 수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감각은 정직한 전달자입니다.


보통은 이 다음에 ‘느낌’을 감각의 하위, 감각의 여진(餘震) 정도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도 아다시피.

느낌은 짐승의 것도 있지만, 불로 정련돼 천상의 것이기도 합니다.

느낌은 이중국적자입니다.

지상의 것인 한편 천상의 것입니다.

정신의 것.


인간적이라는 말을 인간의 육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펼치면 동물과 같은 것이지만

인간은 동물과만 공유하지 않고 천신들과도 자신을 공유합니다.

그때 그 정신은 추상적인 개념, 고작 이분법뿐, 셋만 돼도 손발이 묶이고 맙니다[우리는 삼체 문제(三體問題, three-body problem)의 해를 구하지 못합니다]. 우리 정신은 고작 이체(two-body) 문제를 풀어 왔고 계산해 낼 뿐입니다. 너머는 상상할 뿐이고, 매우 부정확하여 한편 어지럽고, 한편 아름답습니다. 미학이 ‘질서’만 찾는다면 어지러운 거고, ‘숭고’ 그 거대함을 받아들인다면 — 이로써 비록 터져 버리지만 — 아름답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삼체를 가볍게 뛰어넘어 무한으로 이끄는 것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 느낌은 할 수 있는 한 바닥에서 날아오른 것입니다.

그 출발은 분명 ‘발끝’이나 그 끝은 ‘머리’를 꿰뚫고 지나갑니다.

머리에 걸리지 않고 한 번 더 추진력을 얻습니다.

마치 로켓이 중력의 장을 탈출해 놓여 나듯이.

나붓하게. 사뿐하게.


시인은 이를


<불을 느낀다>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느낀다>고.


그리고 이 느낌이라는 천공을 가르는 화살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날아가고


<마침내>는

<가슴으로 쳐들어가는> 것이거니와


이 화살, 또는 불, 또는 불붙은 화살, 또는 불길이 변하여 쏘아진 화살은

아니, 이 전부는 오로지


<결심하는 자의 망설임>입니다.


불은 외부의 감각처럼 닥쳐오지만

실상은 내부의 것입니다.

혹은 내부와 외부가 마침내 맞닿아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불을 느낀다>는 것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의 광기(狂氣)를 듣는다.>


시인은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일반 문법의 경계 밖을 넘나드는 시는

보통은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마침표가 일반적인 문장의 끝을 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는 다른 수단들을 많이 가졌고

문장 종결 부호 같은 건 도리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져다 쓸 때,

시에서 문장부호도 시어입니다.

마침표의 의미는 그렇게 평이하지 않습니다. 나붓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언(manifesto)이고

불을 확 지르는 짓입니다.


시인은 선동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선언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감동하거나 감응하여

선동의 결과에 이를지라도

이 고양된 선동은 거짓에 기반하고

목적을 이루려 조작하는 여느 선동과 다릅니다.

정확히는 여전히 선동이 아닙니다.

선전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막힌 둑을 허물어 봇물 터지는 것이니까요.


본래 그러한 것이

인습에 의해, 시절의 궁핍으로 나타나보이지 않다가

시라는 해방 도구로, 시인이라는 현상으로

펑 터지는 것입니다.


펑, 하고 봇물이 터지고

펑, 하고 불꽃이 터지고,

펑, 하고 가슴이 터집니다.


터진 가슴은

더는 앙상한 ‘자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가슴은 터진 가슴들끼리 이어집니다.

커다란 가슴을 이룹니다.


시는

둘의 원리[다르-게 하-다]가 아니라

하나의 원리[하나-이/되-게 하-다]입니다.


불타오르십시오.

불을 온통 느끼십시오.


불이 붙어

시인이 되십시오.


그 열기는 온세상을 태울 터이나

시인은 타지 않고 타오릅니다.



*한국어 ‘노골’은 세소토어 lokolla (to releas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드러내는 것> 즉,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전문적으로 확증할 수 없고, ‘노골’과, 이 폭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평안, 긴장의 해소를 함께 떠올리는 어원으로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예람이에게 | 달빛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