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별점: ★★★☆
주인공의 강렬한 캐릭터가 인상 깊었던 소설이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가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인간 강민주의 한계가 드러나며 루즈해지는 기분이었다.
추천하는 대상: 인간의 성별 간 차이, 젠더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 극적인 전개를 좋아하는 사람
인간 실현을 위한 여성 문제 상담소에서 고통을 앓고 있는 여성들의 상담을 들어주는 여성 대학원생 강민주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가정폭력을 휘두른 가장의 지배 하에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여성들을 도와주고자 상담소를 차리고, 심리학 공부도 병행하는 학자로서 살아간다. 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공공연했던 성차별 문제에 환멸이 나있었고, 이를 노골적으로 꼬집는다. 이 문제를 타개할 방안을 실현하고자 그녀는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백승하를 납치한다. 백승하는 당시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남성의 이미지로 보여진다. 잘생긴 외모, 훌륭한 성품, 아내를 향한 지극한 사랑까지. 여성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 것이 백승하의 죄였다고 강민주는 판단한다. 그러하여 그녀는 백승하를 납치하고, 그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추악한 이면들을 폭로하고자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소설을 파격적이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세상의 문제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부조리에 맞서 자신의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캐릭터는 여태껏 봐왔던 어떤 인물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속 주인공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망상가였다면, 강민주는 그와 정반대의 미친 행동력을 보여준다. 자신이 마주한 부조리에 맞서 저항한다는 점에서 알베르 카뮈가 지향한 이상향과 들어맞는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농(no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다. (해설)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이 뒷부분은 강민주가 신적인 존재,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원래 강민주는 자기 자신을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사랑이나 슬픔, 기쁨같은 그녀의 감정과 욕망은 소설의 중반까지 잘 보여지지 않는다. 최대한 ‘절제’되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강민주의 성격을 다른 작품에 빗대면.. 셜록 홈즈와 유사하다. 자신의 목표(범인찾기, 게임, 납치)에만 광인처럼 집착하고 다른 사적인 모습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녀는 자기가 납치한 백승하와 가까워진다. 독자는 소설 후반부에서 '인간 강민주'를 만나게 된다. 소통과 공감으로 이어진 두 사람은 더 이상 범죄자와 피해자가 아니게 되었다. 수직관계가 무너졌다는 뜻은, 그녀가 원하던 계획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그녀의 목표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사실 그 목표는 인간으로서 강민주가 이뤄낼 수 없는 허상이었을 것이다. 백승하는 일방적인 ‘악’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었고, 강민주 자신 또한 복잡한 한 명의 사람이었기에.
후반부로 치닫을 수록 강민주는 자신이 벌여온 행동과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백승하를 위해 아들을 하룻밤동안 잠시 납치해 와 시간을 함께 보내게 해주고, 그와 연극 연습을 하는 등 그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쏟게 된다. 이전 그녀의 심리와 대조해보면, 잘 맞지 않는 듯하다. 그녀도 인간이고 백승하도 인간이기에, 한 집 아래에서 유대감은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그녀의 강렬한 캐릭터와, 당대 사회의 민낯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다. 고구마 하나 없이 재미있었던 소설이다. 금방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