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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by 녹턴

별점: ★★★☆

추천 대상: 사랑이나 추억에 대한 시를 많이 읽고 싶다면, 관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오랜만에 책이다. <구관조 씻기기>를 썼던 황인찬의 문학동네시인선 작품이다. 제목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인상깊은 시를 몇 개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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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화병에 꽂히기로 결심했으므로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온 집안에 썩은 내가 가득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왜 꽃을 버리지 않느냐고 묻겠지
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면 장미는 완전히 마르고
너는 이 집에 없을 것이다

(후략)


장미가 화병에 꽂히고, 장미가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장미는 화병에 담겨 있다. 왜 상대는 끝까지 꽃을 버리지 않았을까.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그저 지나간 사랑의 잔향을 맡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남은 꽃병에는 목이 꺾인 채 말라버린 장미가 남아있었다.

다시 한 번 화자는 상대에게 장미를 준다. 장미는 시간이 지나면 생명을 다 하여 썩는다는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장미의 결심이라고 믿는다.


‘꽃은 묘지에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는 법인데’

이 시는 꽃의 생성과 소멸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둘은 모순되는 시어이지만, 동시에 이어지기도 한다. 죽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시구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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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가득 마음도 가득 가로등도 가득 돌도 가득
그런 것이 신도시의 비 오는 저녁 풍경이고

가도 가도 사람뿐인 이 도시에서 잠시
없지만 따뜻한 마음과
없지만 작은 정원을 생각합니다

(외투는 모직 신발은 피혁 중에서)


신도시는 도시보다 훨씬 도시같다. 이제 막 지어진 새하얀 건물들, 페인트 냄새가 떠오른다. 가끔 과외를 하러 신도시까지는 아니지만 뉴타운을 갈 때가 있는데, 특히 아이들과 학원가가 많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고,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 새것 냄새가 나는 건물과 교차로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 이게 뉴타운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이 시는 신도시의 꽉 찬 풍경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대중 속의 혼자를 그려낸 시구가 많이 보였다.


저는 마음이 없군요 사람도 아니군요
우산을 쓴 사람이 바지를 입은 사람에게

“진심이야?"
묻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빗속을 걷습니다
무심하게 걷습니다

(외투는 모직 신발은 피혁 중에서)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이 시를 읽고, 제목과 동일한 시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중에서)


두 시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언뜻 보면 이어진다. 두 시 모두 읽으면 이방인이 된 채 떠도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현재의 정서는 외롭다. 화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떠밀려가거나, 힘없이 행동하는 태도가 자주 나온다. 정적 속에서 상황을 관조한다는 건 전작 '구관조 씻기기'와 별 다름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시어, 그가 만들어내는 시의 분위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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