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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남주 Dec 30. 2024

시간으로서의 나

함성 미라클 글쓰기 챌린지 10기 14일차

다른 사람의 깊은 사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나면 내 삶이 달리 보인다. 

내 딛는 걸음도 더 조심스러워지고, 

내 뱉는 말도 더 착해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눈길도 더 따뜻해진다. 


한강의 <흰>을 다 읽었다.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고 읽어나갔다.

뒤에 이어진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해설까지 읽었다.


143쪽_ 해설 

한강은 자신의 일련의 작업들이 일종의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중략)

질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 (채식주의자 / 2007)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바람이 분다, 가라 / 2010)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볼 때 그것이 가능한가 (희랍어 시간/ 2011)

내가 정말 인간을 믿는가, 이미 나는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인간을 믿겠다고 하는 것일까 (소년이 온다 / 2014)

-물음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한다.

-바로 그 '변화'안에 답이 들어 있다.

-질문은 스스로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된다.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한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169쪽

어떤 의미에서 '흰'은 노랑, 검정, 빨강, 파랑과 같은 여타의 색깔과 대등한 색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원의 색이고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색이다.

침묵과도 같은 것.

시작하기 전의 무(無)

태어나기 전의 무(無)


누구도 결코 소진시킬 수 없는 흘러님침의 잠재성들이 우글거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차원


인간은 끝없이 훼손되고 끝없이 더럽혀질 수 있지만 언제나 끝없이 그 위에 다른 윤곽선을 그리고 다른 색을 칠해볼 수 있는 '흰'의 차원이 있다고.

그 '흰'의 차원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한 자들이... 죽어가는 타인에게 온 힘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고.


175쪽

'흰'은 언제나 흘러넘치는 과잉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적대적으로 차갑게 인간의 현존의 문장들을 여백 속에 빠뜨리고 자우고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다.

'궁극의 가능성'이다.


인간이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인 '앞선 거기(Vorbei)'를 향해 달려나가려 할 때, 

그 '앞선 거기'가 그의 일상과 부딪히고 그로 하여금 그의 일상을 다르게 보게 하며 그것에 의이의 제기하게 하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이탈하게 하는 한에서만 시간은 흐른다. 


인간의 본질이 그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나가는 데 있다면, 인간이 곧 시간이다.


인간은 본래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시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는 것


인간 그 자신이 본래적 시간 그 자체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만큼, 

시계의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만큼,

'흰'의 차원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만큼,

이 차갑고 적대적이며 동시에 연약해서 쉽게 사라지지만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 해사얀 눈송이는 녹지 않는 것이다.



해설을 읽고 나서야, <흰>이 어려운 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려운 글을 내가 너무 쉽게 읽을 뻔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아니다!

작가는 어려운 이야기를 쉬운 글로, 독자인 나에게 해주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24년이 저물어 간다.

오늘 하루를, 

'시간으로서의 나'를 인식하며 보내야겠다. 


24.12.27 금요일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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