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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15. 2023

1-1. A 처장_믹스커피와 흰머리의 추억

무해해서 더 무서운 신입사원

“내가 그 유명한 4대 천왕을 다 모셨는데 말이야~” 하는 흥미진진한 영웅담을 으레 듣게 된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우습게도 “상사를 모신다?”, 분명 이 희뿌연 담배연기 속 대화는 건설적이기는커녕 천왕들의 무시무시한 행보로 시작해서 대부분 현재 상사의 뒷이야기로 끝날 예정이지만 그래도 상사라고 모신다고 높여주네? 이 사람 보기보다 더 회사에 스며든 회사 맞춤형 인재구나 싶었다.

골프장으로 나가는 첫날을 “머리를 올린다”라는 표현처럼, 모시다 역시 그런 맥락인가. 그래서 찾아본 “모시다”의 사전적 의미는 “웃어른이나 존경하는 이를 가까이에서 받들다”였다.


음, 그래, 웃어른은 인정.


 

내가 처음으로 모신 아주 가깝고도 높은 상사, 무거운 자리에서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A 처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신입사원의 엄청난 패기로 무장한 나는 8시 전에 회사에 출근했고, 그럼에도 대부분의 상사들은 출근해 있었다. 신문을 챙기고 마땅히 할 일 없이 자리를 지키곤 했는데, 그 자리가 A 처장의 사무실 지척이었다. 오며 가며 한두 마디씩 던지더니, 어느 날은 믹스커피를 타 달라고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기분 좋게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믹스커피를 탔고, 그의 첫 반응은 “어이구 이거 한강이네, 한강이야”였다.

내가 믹스커피를 먹지 않으니 물 양을 어찌 알았으며,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눈앞에 있는 A 처장을 두고 자연스레 행동하고 싶었다.


알고 보니, A 처장은 팀의 신입사원들에게 믹스커피를 주문하는 단골 고객이었고 다른 신입사원들과도 종종 농담 따먹기를 했다. 그렇게 대화를 섞으며 과중한 업무에 가득 찬 본인의 머리를 환기시켰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의 사무실에는 결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고, 어떤 때는 고성이 들리기도 했으니.


사실, 신입사원인 그때의 나는 A 처장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지 못했다. 물론 꽤 높은 상사 인건 알았지만 초짜가 보기에는 회사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높아서 그중에 조금 더 높은 사람이구나 정도였다.

나는 기실 그를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A 처장은 회식을 소규모로 그리고 즉흥적으로 진행했고 한두 명의 차장을 제외하고는 주로 신입사원으로 구성되었다. "라테는~" 하며 가르치거나 본인을 뽐내는 자랑이 아닌 요즘은 뭐가 유행인가 하는 시시콜콜한, 한없이 가벼운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회식은 싫었지만 A 처장의 회식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고기도 맛있었고, 가끔은 즐기기도 했다.

문제는 긴장감 없던, 동네 아저씨를 대하던 태도의 연장선이 사무실에서까지 이어졌다. 한 번은 누군가 내가 A 처장에게 받아치는 말을 듣고 “헉~” 하며 놀랬다. 그때 나의 기시감은, 아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내가 실수했구나였다.


하지만 한번 놓아버린 긴장의 끈은 붙잡기 어려웠고, 어느 순간 나와 다른 신입사원 한 명은 A 처장의 흰머리 뽑기 담당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옥황상제 시중드는 시녀도 아니고 손주가 효심이 깊어 할아버지 할머니의 흰머리를 뽑는 게 아닌, A 처장이 비교적 한가할 때를 틈타 통유리라 그 안이 훤히 보이는 사무실에서 신입사원 두 명이 새치를 정리하고 담소를 나누는 거다.


맥락과는 맞지 않지만 난 흰머리 뽑는 걸 즐기는 편이다. 나와있는 새치를 없애 버릴 때의 희열이란. 누군가에게는 얼굴에 뾰루지가, 손톱의 거스러미가 되겠지만.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서조차 누군가의 머리에 한두 개의 빠져나온 새치를 보면 손가락이 간질간질한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나는 정말이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가끔 친척 어른의 흰머리도 자진해서 뽑아주니까.


사무실 몇몇은 슬쩍 화장실에서 얼마나 힘드냐고 걱정스레 말을 걸어왔다. 나는 힘들지 않아서, 괜찮다고 대답했고 그들이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으레 시큰둥 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그땐, 머리에 꽃밭만 가득한,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무해 하지만 그래서 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 입. 사. 원이었다. 그러다가 받은 한 선배의 전체 메일에 혼자 찔린 걸 보니 내가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자각은 하고 있었나 보다.

이메일의 골자는 이거다.


“회사 생활에서 한 사람을 끌어올리기는 어려워도, 그 사람 앞길에 고춧가루 뿌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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