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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14. 2023

16-1. P 차장_너무나 피곤한 그녀

나에게는 이상적인 상사

그녀는 다소 자그마한 체구에 낯빛이 어두워 늘 힘이 없어 보였다. 눈에 조금이라도 더 띄려는, 앞다퉈 반짝이려는 상사에 익숙했는데, P 차장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의 지사에서 P 차장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몇 달이 한참 지나서였다. 차장인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다녔고 그녀의 평가도 듣기 어려웠다. 애초에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낙하산을 마주하며 생긴 자괴감과 O 차장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P 차장을 마주하고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그녀는,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상사였다. 부서 이동이 결정되고 P 차장에게 인사하러 사무실에 갔더니, 두 손을 꼭 잡으며 정말 잘 왔다고, 고맙다고 되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연신 나를 추켜세우는 그녀의 말은 따뜻했고, 오히려 송구스러운 기분이었다. 뭐랄까, 나를 알아봐 주는 상사에게 이 한 몸 다 바쳐 충성하고 싶어 졌달까.   

 

이동한 부서는 고참 과장이 대부분으로, 퇴직이 코 앞이라 업무보다는 연륜으로 일을 처리했다. 일이 어느 정도 있긴 있었지만, 총괄 업무 때처럼 긴박하지 않았고, 하루에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 민원업무에 더 가까웠다. 프로젝트성 일을 하다가 다시 단순하고 반복적인, 하루살이처럼 끝이 있는 일을 하니 반가웠다. 업무에도 곧 익숙해져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기 일쑤였고, 지사에 이런저런 소문들을 누구보다 빨리 접하기도 했다. 회사가 또 이렇게 흥미로운 곳이었나 싶었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직원들의 권력 다툼 현장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그러니까, 이 부서는 노땅들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일하며, 싸우고 삐졌다가, 큰소리를 치며 회사의 권력자들과 친분을 과시하는, 인간관계가 일보다 우선인 부서였다. 업무가 바쁘면 일하느라 사람 사이 문제도 없을 텐데, 일은 없고 말이 많으니 아주 산만했다. 오히려 시끄러울 정도였다. 방앗간 마냥 지나가는 새들마다 들려 커피를 마시면서, 하나 둘 소식을 물어다 주고 떠났다. 그러니, 소문의 근원지이며 와전되기 적격인 장소였다.


나는 부서에서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역할에 충실했고, 때에 맞춰 간식을 꺼내거나 커피를 탔다. 고참 과장들의 수발도 내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 정도 업무양에, 커피 타는 건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어디나 스트레스는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왜 이 부서의 선호도가 낮은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들어주는 데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일을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정당하게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이상하게 회사와 상사에 이용당했다는 나의 자격지심에, 이번 부서에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겠다는 다소 괘씸한 다짐을 했었다.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적당히, 있는 듯 없는 듯, 티 나지 않게 회사를 다녀야겠다고. P 차장도 말은 따뜻하게 했지만, 고참의 업무를 내게 넘길지 두고 볼 일이니까. 회사란 비정한 곳 아닌가. 

그리고 실천에 옮겨 이번엔, 성공한 듯했다. 그런데 성공이라고 하기도 민망스러운 것이, 내가 일을 적당히 처리해도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비교 군이 고참 과장들이라, 조금만 빠르게 처리해도 젊은 직원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며 칭찬일색이었다. 일은 그만하고 이야기나 하자며 채근하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고참 과장이 많기에 P 차장의 입지는 꽤 좁을 거라 여겼는데 웬걸, 그녀가 정말, 이 지사의 숨은 고수였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차장으로 승진을 했는데, 승진 전에 여러 부서에서 근무하여 누구보다도 직원 업무에 빠삭했다. 날고 긴다는 기 센 고참 과장들도 그녀의 앞에선 맥을 못 추었다. 그만큼 업무를 잘 알고 정석대로 진행했기에 일로는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FM이었다. 프로젝트 안에 큰 그림은 그녀의 손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업무분장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확실히 나뉘어 업무 하기 수월했다. 다만, 그녀가 리더로서의 자질이 너무나 뛰어나 그녀가 시키는 대로만 일을 했기에 업무를 예전만큼 몸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찾아 공부해야 기억에 남는데, 다 떠먹여 주니 먹기만 하면 되었다. 이만하면 참 호강이었다. 그러니, 겉핥기식으로 업무처리를 하는 어정쩡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도 P 차장은 지시에 순순히 따르는 나를 보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녀가 직원일 때, 다른 사람들의 업무를 떠맡아하던 기억이 있어, 다른 차장들보다 업무분장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업무분장을 공평하게, 칼같이 지켰고, 고참과장이 살짝 선을 넘으려 하면 그 일은 당신의 일이라고 다그쳤다. 나에게는 참, 이상적인 상사였다.



 P 차장은 대범한 업무 진행에 비해 평소에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직원들을 대했는데, 사실,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녀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조금이라도 고참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면, 그 소문은 하루가 안되어 그녀의 귀에 다시 들어갔다. 그래서 P 차장은 그들을 어르고 달래며 부서를 이끌었고, 고참 직원들은 입 발린 소리인 줄 알면서도 뿌듯해하며 그녀가 지시한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연배가 연배이다 보니, 처장 혹은 그 이상의 높은 상사들과 친한 고참 과장들도 있었는데, 은연중에 그들을 들먹이며 친분을 과시했다. 차장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는 듯이. 교장선생님과 바둑을 두는 정년퇴직을 앞둔 할아버지 선생님이 생각났다. 덧없었다. 그게 뭐가 대수라고 무시하면 그만일 텐데 P 차장은 그들의 너스레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시나 벌어질 직원들 간의 잡음도 P 차장은 늘 주의했다. 고참 과장이 선을 넘으면 그들을 따로 불러 타일렀고, 그들에게 당하는 비교적 젊은 직원들은 칭찬하며 노고를 인정해 주었다.


사무실의 조용한 중재자이자 여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중요한 키맨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너무나 바빴다. 살이 찔 수가 없었다. 팀장과도 적당히 잘 지내야 했고, 고참 과장들 기분도 고려해야 했고, 이제 들어온 그나마 일을 시킬 수 있는 나도 잘 구슬려야 했고, 업무는 정석대로 진행해야 했다. 타 부서에 넘어오는 일도 즉각 반응하여 정리해야 했다. 조용했지만, 늘 촉각을 곤두 세우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녀를 스스로 불살라 태워 일했다. 보는 내가 다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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