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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13. 2023

15-2. O 차장_뿌려둔 씨앗이 많았음에도

나는 나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자상한 면모를 이용하는 직원이 생겼다.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신입사원이었는데 일명 낙하산으로 유명했다. 처음 한두 번은 아프다고 늦게 출근하기도 했고, 병원에 간다고 해서 O 차장의 배려 아래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모두가 야근해야 하는 상황에 집이 멀다고 혼자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타 부서 직원이 근처 PC방에서 그를 발견해 버렸다. 들키지나 말지. 

본인이 맡은 일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겉으로는 말쑥하게 생겨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고서는, 속은 맹탕이라 하는 일마다 문제가 터졌다. 수습은 나와 고참 과장의 몫이었다. 같은 직원의 신분이니 강하게 말하지는 못해도 선배랍시고 나름 단호하게 이야기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런 신입 직원에게 O 차장은 주의만 줄 뿐 추궁하지는 않았다. 낙하산이라 그런 건지, 말이 안 통한다고 여겼는지,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바빴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첫인상에 비해 야물지 못했다. 아프다고 눈에 훤히 보이는 꼼수를 쓰는데도, 진짜 아플 수도 있지 않냐며 넘겨버렸다. 

 

일이 많으면 하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직원이 일을 하지 않고 태평한데, 그의 몫인 일까지 내가 전담하니 상대적 박탈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도 저렇게 하면 누가 대신 수습해 주는 건가.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알아왔던, 지금까지 일했던 회사가 아닌 것 같았다. E팀장 같은 사람에게 한번 호되게 혼이 나야 정신 차릴 텐데. 나도 벌써 꼰대가, 회사물을 가득 마셨나 보다. 

낙하산도 인물이라면 인물이었다. 높은 직급의 상사들에게는 커피를 타고 연신 웃으며 깍듯이 대했고, 말은 청산유수라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인사성이 밝다며 평판이 좋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나는 그가 참 같잖았다. 내가 차장이라면,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따끔하게 야단은 칠 것 같았다. 그렇게 신입사원의 기행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알면서도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으니 도마 위에 자주 오르긴 했어도 서서히 관심이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나에겐, 현재진행인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낙하산의 업무에서 허점이 드러나게 되자, 웬걸 업무분장을 다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업무 중 일부가 나에게 넘어오는 시나리오였는데, 예전의 나였으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팀장과 차장에게 그렇게 못하겠다고 항명했다. 지금도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는데, 업무 조정까지 하면 신입사원은 일을 배울 기회를 잃게 된다는, 명목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일이 더 생기는 구조의 회사였다. 여기는, 승냥이가 가득한,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였지만, 나의 도량이 그리 넓지 않아 점점 옹졸해져 갔다. 그가 업무전화가 아닌 개인전화로 사무실을 비우는 상황이 잦아지고, 그를 찾는 전화가 나에게까지 넘어오자 나는 분기탱천했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그려졌다. O 차장도, 그리고 이번에 새로 부임한 팀장도 승진 대상자였는데, 행사도, 일도, 회식도 모든 게 평소의 두 배 이상 될 게 분명했다. 이미 I 팀장의 승진 때 나름 굴려져 피해의식이 남달랐던 나는, 더 이상 회사에,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낙하산에게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당하고 있는 시기라 더욱 예민했다. 

인간적으로, O 차장을 생각한다면, 내가 같은 부서에 남아 지금처럼 일하는 게 그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직원이 총괄자리에 온다면 적응해야 하고, 그동안 O 차장의 업무에는 부하가 걸릴 것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녀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신입사원을 제지하지 않고, 내가 뒤처리 담당을 계속하니, 어느 순간 일도 내 마음도 한데 다 꼬여버렸다. O 차장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이유들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합리화했고, 그녀 보기 낯 뜨거웠으나 O 차장에게 부서 이동을 하고 싶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놀랜 눈치였지만, 역시나 승인했다. 

 

나는 도망쳤다. 일에서, 그녀에게서, 그리고 낙하산에게서. 나 역시 신입사원과 같을지 모른다. 마음 약한 그녀이기에,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사실 예상했다. 나는 나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 회사, 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우선으로 여기고 이동해 버렸다. 그리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붙잡아 봤자 결과가 좋지는 않았을 거라 여겼을 것 같다.

같은 지사 내의 이동이라, 이동 후에도 O 차장의 행보를 조용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바빠 보였다. 여러 부서의 일을 조율하러 다녔고, 시기마다 찾아오는 행사를 주관하고,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한 번씩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가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인간적이었던, 회사 같지 않아 마음 편했던 소소한 수다 자리가 그리웠다. 정치적이지 않고, 무념무상으로 멍하게 있을 수 있던 그 사무실이. 하지만, 나는 회사 직원이었고 그녀는 상사였다. 업무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상황이 얽히니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성격이, 생각이, 보는 시선이 다른 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그저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이동한 부서에 적응하며 O 차장의 사무실에 찾아가는 날이 줄었다. 그리고 지나가다 마주쳐도 그녀는 굳은 얼굴로 바삐 다녔다. 높은 상사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다. 그리고, 굳이 결과를 논하자면, O 차장은 승진하지 못했다. 정말 승진했으면 하는 사람이 승진하지 못했다. 내 주변에 대부분이 승진을 했는데.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나의 지나가는 생각으론, 그녀가 정작 필요로 할 때 그녀를 끌어주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 없었다. 모두가 본인들 생각만 했다. 그녀는 뿌려둔 씨앗이 많았음에도, 유난히 혹독한 날씨와, 다른 새들의 새치기로 본인의 열매는 맺지 못했다. 업무 성과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다 사람이다. 인맥관리라고 하던가. 


그녀가 덜 상처받았기를, 그럼에도 올곧게 다시 일어서기를, 내가 진심으로 바란, 사람냄새 가득한 상사 O 차장.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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