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났다
그녀는 사소한, 나의 작은 행동도 알아봐 주는 상사였다. 탕비실에 한 번은 커피를 마시지 않은 P 차장을 위해 유기농 차를 준비하고 식사를 거의 안 하는 그녀이기에 달지 않은 간식을 몇 개 구비해 두었는데, 살짝 내 자리에 오더니, 고맙다며 씨익 웃어 보였다. 알아봐 준다는 것, 인정해 준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고, 고마웠다. 상사의 한 마디가, 아직도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그리고 그녀는, 당근을 참 적절히 사용하는 상사였다.
하도 말 많은 사무실에 있다 보니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조심해야 했다. 고참과장들은 하나같이 말을 전달하기 좋아했고, 나에 대한 평판도 이미 여기저기 흘러 다녔다.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중간에서 이쪽저쪽 본인의 사견을 담아 말을 옮겨 곤란했던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만일을 대비해 귀는 늘 열려 있어야 했고, 입은 무거워야 했다. 문제가 되지 않을 말만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 특유의, "족보 파헤치기" 도 견디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궁금함이 어찌나 많은지 대답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봤다. 질문에 답을 하면 그다음 질문이 쏟아졌다. 왜 본인들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가벼울까. 기실, 그들에게 궁금한 부분이 없어 물어보지도 않았다.
처음엔 미주알고주알 대답하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입을 닫았다. 모르는 쇠로 일관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엄마 아빠에게도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는데, 생판 남에게 내가 뭐 하는 중인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회사에 온 건지, 수발을 들러온 건지, 아무리 퇴직을 앞뒀다지만 이렇게 긴장 없이 일을 하는 게 의뭉스러웠다. 그렇게 매너리즘에 한창 빠져있었다.
그때, P 차장이 내게 다가왔다. 승진시험 준비를 하라고. 시험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지난 시험 때의 속상함이 아직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이미 한 번은 시험준비를 고사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능한 한 시간을 확보해 준다고, 나중에 나이 들어 공부하려면 진급은 더 힘드니 준비해 보라고 권유를 했다. 본인이 늦게 승진하니 애로사항이 많다며. 그리고, 운이 좋게도 직원발령으로 젊은 직원이 부서로 전입해 업무 부담이 줄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기회였고, 총괄업무를 했을 때의 아쉬움과 낙하산 직원을 경험하며 정당한 권한이 없어 애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차피 언젠가는 할 공부, 다시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의 결심을 P 차장에게 전달했고, 그녀는 본인 일처럼 기뻐했다. 업무회의에서 P 차장은 땡땡씨 승진시키자며 직접 직원들을 설득시켰고 나의 업무 중 일부를 그들에게 맡겼다. 새로 전입한 젊은 직원이 내 업무의 대리자가 되었는데, 나도 이제 나이가 좀 들었는지, 싹싹한 그녀가 참 이뻤고, 그녀가 일을 잘하니 금상첨화였다. 그녀가 업무 대리자라 믿음이 가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겠다 하는 안도감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C 과장이 생각났다. C 과장이 승진시험 준비를 할 때, 내가 전입해서 그녀의 업무를 인계받았었는데 그때 누구더라. C 과장 업무 하는 거 힘들지 하며, 그래도 언젠간 너도 도움을 받을 거야,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인생 참, 길게 봐야 하는 거다.
P 차장에게 참 많이 고마웠다. 일도 일이지만, 공부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끌어 준다는 것에 그녀의 호의가 느껴졌다. 일을 하고 있으면 부러 큰 소리로 땡땡씨 공부 안 하냐며, 공부해서 나중에 본인 잊지 말고 챙겨 달라는 심심한 농담도 던졌다. 확실히 회사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독서실도 가니 공부의 흐름이 잡혔고, 신기하게도 2년 전에 공부했던 내용들이 기억이 났다. 아무래도 업무 관련이라 사장되지는 않았나 보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나는 시험을 쳤다. 시험이 끝나고 미용실에 가서 길어진 머리를 다듬었는데, 뭔가 후련했다.
시험의 결과를 몇 주 남겨둔 채, 나는 회사를 휴직했다. 계획에 있던 일이었고, 생각보다 덤덤하게 부서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에 P 차장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났다.
그녀는, 내가 만난 여러 상사 중 감히 외유내강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단단하고,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상사였다. 많은 일들을 일일이 상대하느라 피곤한 그녀의 건강이 오히려 걱정될 만큼. 사람을 배려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금까지 나만 알던, 나만 소중히 여겼던 회사 내 나의 노력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감히 알아차려 달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알아준다는 마음이, 그 세심한 마음씨에 참 많이 위로받았다. 알면 알 수록 따뜻한, 진국인 그녀. 그녀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이런 상사가 있기에, 아직도 회사는 굴러가는 것 같다.
늦은 차장승진으로 그녀는 아직 팀장승진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가 다다르면, 내가 지켜본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운 좋게 그녀와 같이 있다면 이번엔, 그녀를 감히, 내가 옆에서 응원하고 싶다. 나는 P 차장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 사랑한다. 그녀가 나의, 상사몽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어, 감회가 남다르다. 진정 사랑하는 상사를 만나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