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이름이 여성적이었다.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름과 사람을 따로 두고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B 차장은 그랬다.
그리고 드물게도 B 차장의 첫인상은 이상하리 만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짐작해 보자면, 그의 성격상 지사장과 대화하는 나를 매의 눈으로 먼발치서 지켜보았을 것 같다. 내가 B 차장의 부서로 배치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잘한 일에는 나서지 않지만, 한 번 칼을 뽑으면 본인 직성대로 하고야 마는, 무소불위 이 지사의 터줏대감이었다. 윗사람인 팀장에게도 완곡한 거절이 아닌, 그만의 큰 목소리로 무안하리 만큼 지사의 과거사를 줄줄이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견에 정당성을 피력했다. 하지만, 본인에게 순응하지 않은 직원에게는 가차 없이 냉정하고, 거칠었다.
업무회의 중에는 안경테 너머로 날카롭게 명령했고, 흰머리 뽑기 담당이었던 과거의 나는, 절치부심하여 이제 일 다운 일을 하고 싶었기에 열심히 노트에 지시사항을 필기했다. 노트의 칸이 점점 밀려날 때마다 부담감도 깊어졌다. 이것도, 저것도, 또 다른 공문도 오늘 안에 해야 한다고?
무슨 권한을 신청해야 하고 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인계자는 시험 준비로 바쁘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서늘하게 나를 바라보던 B 차장의 눈동자가 아직도 나를 응시하는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눈치를 보며 인계자가 사무실에 있을 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고, 하나씩 업무가 추가될 때마다 내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난 잘하고 싶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지나다니다 사무실에 드나드는 직원들에게 인사도 해야 했고, 배부되는 공문을 출력하여 읽기도 했고, 잔잔 바리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 오는 등 뭐가 뭔지 모르는 엉망진창인 한 주를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몇몇 선배들과 믹스커피를 마시며 나눈 소소한 대화 속에서 B 차장이 괴롭혀 지사에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며, 그는 악질이라 나의 고생길이 훤히 열렸으니 힘내라는 심심한 위로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겁나는 인상과는 달리 마음은 여릴지 누가 아는가. 드러나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다. 어릴 때 무서웠던 삼촌과 지척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의 타박 섞인 잔소리 뒤에 애정 어린 염려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B 차장은 피가 섞인 삼촌이 아니고, 나는 또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봐야 아는 회사 숙맥이라 이 사달이 났다.
한동안은 자기 전 머리맡에 업무노트를 두고 잠들었다. 내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을 복기했고, 또 그러다 보면 깜박 잊어버린 지시사항이 생각나서 노트에 얼른 추가했다.
회사와 집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내가 완료한 일에 체크 표시를 하며 희미하게 웃는 등 나는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몇몇 지사를 전전해 본 지금에서야 깨달은 바,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어딜 가도, 누구와 있어도 내 성향상 처음은 힘들다. 하지만 그 당시 인사 발령은 처음이었고, B 차장으로 인해 그 스트레스가 과중된다고 여겼다.
어찌 되었건, 나는 쓸모가 있었고 생각보다(?) 일머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B 차장도 경계를 누그러트리며 “이건 안 읽어도 결재해도 되겠지~”라며 업무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덧붙여, 자신이 이 회사 공문을 하나하나 다 처리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며 지사의 고충을 피력함과 동시에 본인의 수고로운 노력 또한 넌지시 뽐내는 철저한 본인 위주의 사람이었다.
그 후, 나의 노력이 빛을 바랐는지, B 차장이 다른 부서로 이동할 때 나를 친히 간택하여 나는 몇 개월 만에 다른 업무에 다시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말 많은 주변 직원들은 “예쁨”을 받는다며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그러려니 했다.
터줏대감인 그는, 나 이외에도 재빠르고 근무 성적이 좋은 직원들을 쏙쏙이 빼 갔는데, 지사 내 누구도 항의하지 못했다. 다들 믹스커피를 마시며 뒤에서는 줄기차게 원망을 했지만 그의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었다.
B 차장의 영향력은 부서 간 업무 분쟁에도 큰 힘을 발휘했는데, 신기한 것이 분명 이전에는 지금 부서 업무였는데, 그가 이동 후에는 타 부서 업무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B 차장이 내 편일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마냥 든든했다.
B 차장의 오랜 회사 경력과 업무지식으로 직원에게는 엄격했으나, “카더라~” 하는 소문에서는 실상 그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여직원은 B 차장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 그를 칼로 찌르고 싶다고까지 하소연을 했고, 결국 다른 지사로 발령이 났다. 그가 공명정대하지는 않았나 보다 짐작했다.
그러니까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는데, 정작 나는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으니, 또 특유의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반장이 이끄는 학급처럼, B 차장이 관리하는 부서는 잡음이 없고, 오히려 성과가 좋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나는 B 차장 덕에 가끔은 호가호위하는 이쁨 받는 졸병의 역할에 충실했고, 꽤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