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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15. 2023

2-2. B 차장_호가호위, 그 달콤함의 말로

뽀뽀 한 번 하자 

그리고 두어 달 뒤, 지사 자체 감사가 실시되었다. 직원들은 요청받은 자료를 작성하고, 소명할 준비로 예민해져 있었다. 


감사 특성상, 일정 기간 동안 발생된 업무를 대상으로 검토하기에, 전임자의 소행임에도 내가 책임져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전임자이고 일의 실수가 없지 않았기에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나의 전임자는 수기로 대부분의 업무를 진행했던 퇴직을 앞둔 과장이라는 거다. 심지어 다른 지사로 전근을 갔기 때문에, 전화로 일일이 확인을 해야 했고, 소명할 자료의 양도 많아 야근이 잦았다. 


어떤 날은 새벽 2시까지 자료를 검색하곤 했는데, 사실 울면서 자료 정리를 했다. 

처음 며칠은 사무실에 혼자 발라드 노래를 들으며 색다르고 낭만적인 분위기와 일하는 나의 모습에 취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쳐갔다. 다른 지사 동기에게 전화하여 울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감사장에 끌려들어 갈 생각을 하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때, B 차장이 나를 호출하여 감사 자료의 진행사항을 체크했고 나는 부끄럽게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 못하겠어요 차장님, 모르겠어요…” 하며 상황을 전달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고, 한동안의 침묵과 얼어버린 그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그의 당황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정말 나는 어렸고 어렸다. 


회사가 아닌 학교라고 생각했는지 B 차장 담임선생님께 숙제가 어렵다며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입력을 하라고 지시한 후, 감사 기간 동안 감사장에 나와 함께 들어가 상황 설명을 했다. 그리고 감사는 지적을 하기는 했으나 친절히 설명해 주며 기한 내 조치하라고 나를 가르쳤다. 

사회초년생 버프가 있었던 것인데, 나는 아직 사용할 줄 몰랐고, B 차장은 연신 나의 부족함을 핑계로 업무 과실을 슬쩍 넘어갔다.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었었는데, 돌이켜보면 직원들의 일을 관리하고 감독, 그리고 결재를 한 건 상사인 B 차장이 아닌가? 


눈물을 흘렸을 때 이런 자료를 찾아보라고 일러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심심한 위로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사 직원들 역시 본인들은 경위서 작성을 꺼림칙해하며 벌벌 떠는데, B 차장은 대수롭지 않게 신입사원의 경위서는 문제가 안된다며 상황을 축소했다. 그리고, 너도 이제 어엿한 회사 직원이라는 선배들의 응원 속에 나는 황망하여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첫 경위서를 작성했고, 웃기게도 그 경위서 역시 B 차장의 결재를 받고 감사에 제출했다. 

결재권자인 상사가 아닌 직원이 책임을 지는 상황이 억울하면서도, 지금은 스며들어 경위서 몇 장 정도는 기본인, 보통 직원이 되었다. 

그럼에도 작성 때마다 마음 한 켠이 헛헛한 건 첫 경위서 작성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특이하게도, 우리 회사 사람인데 B 차장은 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전체 회식은 즐겨하지 않았지만, 본인 부서 직원들만 쏠쏠히 챙겨 보양식을 찾아 먹이는 지역 토박이 출신 “맛집 탐방가”였다. 술은 거의 먹지 않고 맛집만 골라가니 회식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체 회식이 있었다. 다들 날 잡은 것 마냥 술을 마셨고, 나 역시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렇게 다들 많이 마시고는 순례 코스라며 노래방을 갔다. 

회사 상사와 왜 노래방을 가지?라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모두들 노래방에서 얼싸안고 노래를 불렀다. 

나만 이방인이 된 거 같은 기분. 그때 집에 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구석에 앉아 자리를 채우고 있는데, B 차장이 다가왔다. 

보기에는 술에 취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술에 만취했던 게 아닌가 싶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나에게 “땡땡아, 뽀뽀 한번 해도 되나? 뽀뽀 한 번 하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의 B 차장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서 마치 "땡땡아, 이거 결재서류 들고 와라”라는 말처럼, 거부할 수 없이, 그의 명령을 이행해야 할 것 같았다. 업무의 연장선처럼. 


그의 입술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거의 종착지에 다다라서야 얼굴을 돌리고 피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왔고,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경각심이 없었다. 

이 기분이 뭘까 뭘까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어이없게도 아빠가 떠올랐다. 본인은 기억 못 하겠지만 만취하여 집에 와서 기분이 좋았는지 초등학교 고학년인 나에게 뽀뽀를 했었다. 그때의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비교 군이 없었다. 

평소 스킨십이 많은 아빠가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때는 아빠가 술 먹고 이렇게 표현하는군 하면서 웃어넘겼다. 술에 취해 귀가한 아빠는 나사가 하나 빠진 듯 재미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색 비닐봉지 속 과자들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B 차장은 아빠가 아니고, 이 사건은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지나가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었다. 

내 또래의 자녀가 있다고 했는데. 상반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사람에게는 촉이 있지 않은가. B 차장은 나를 예뻐한다고 느꼈어도, 업무에 국한될 것일 뿐 나를 다른 눈길로 본 적은, 그렇게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딸을 보는 아빠의 눈길이었다. 


B 차장은 표현도 투박하게 하는 전형적인 그 시대 아저씨였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친한 입사 동기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상사가 이런다면, 나를 자식처럼 생각해서인가? 하고. 

대답은 불 보듯 뻔했다. 


다음날 회사를 갔고,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보통날이 되어 하루가 지나갔다. B 차장은 기억을 하지 못한 듯 보였고(실제로 부축받아 집에 갔다고 한다), 나 역시 없는 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아주 가끔 나에게 다가오는 B 차장이 생각이 났고, 나는 그때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그를 두둔하고 싶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장면이 선명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없던 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실루엣 정도? 


시간이 약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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