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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le Sep 13. 2022

바스러질 듯이 연약한, 그래서 아름다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이 한 장을 더 넘기면 연약한 그가 푸스러질까봐, 그가 끝내 정말로 무너져 버리고 말까 봐 두려웠다. 책의 페이지들이 많이 남았음에도 감성적이고 극단적이며 아름답고 비관적인 베르테르가 끝내 그가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우울을 견디지 못해 그의 머리에 이미 총알을 박아버릴까봐 떨었다. 읽으며 마시던 커피 안의 카페인 때문인지, 그의 고통을 글자 너머로 전달받아서인지, 심장이 뻐근했다.


처음엔 그저 그가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책의 중반부 즈음엔 베르테르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여느 10대의 불타는, 풋기 어린 시간처럼 사랑에 눈이 멀고 판단력이 흐려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쩔 수 없음”을, 그가 스스로 알면서도 우울의 깊은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그 과정을 함께 짚어가며 어쩌면 외려 우리가 강박적으로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자연을 향한 경외와 사랑을 향한 열정. 왜 순수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감정이 이성을 이겨서는 안 되는 걸까. 왜 우리는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왜 베르테르만큼 세상을 충실하게 느끼고 있지 못하는가.


“손을 내밀어 잡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없이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니던가. 어린아이들은 자기들 마음을 끄는 게 있으면 언제든 붙잡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는?”


본문이 끝나고 후술된 작품 해석을 보면, 베르테르의 이 유약함이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소위 ‘베르테르적 낭만주의’라고 이름 붙어 오랜 시간 학자들에 의해 젊은이들의 자살을 유도하였다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등 여러 평을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젊은 시절 괴테가 쓴 이 책에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저 이루지 못할 사랑에 눈이 멀어 우울에 빠져 자살한 한 남자만이 아니라, 알베르토로 대변되는 “정답”과 “이성”만이 유일한 답이 아님을, 인간 속에 내재된 연약함과 감성,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도 마땅히 존재한다는 것인 것 같다. 날이 맑아도 흐려도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시선, 작고 낮은 것에서도 경외를 찾는 것, 이러한 것들도 이성과 함께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구성 요소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존재를 바쳐 유일하고 무한하며 장려한 감정의 온갖 환희로 가슴을 채우려 애태운다네. 그러다가 아! 막상 그리로 달려가면, 저곳이 이곳이 되면, 모든 것은 전과 다를 게 없어지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가난 속에, 우리의 제한 속에 서 있을 뿐이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사라져버린 청량제를 그리워 한다네.”


이 소설은 괴테의 자전적인 고백이자 허구적인 소설의 결합체로, 젊은 변호사였던 괴테가 그 자신과 샤를로테 부프, 그리고 크리스티안 케스트너와의 관계와 자신의 동료인 예루잘렘이 결혼한 여성을 사랑해 그 자신을 비관해 자살하고 만 이야기를 엮어 만든 책이다. 책 초반부 로테와 베르테르가 만나던 장면과 로테가 어머니의 부재에 자신의 동생들을 잘 돌 본 것까지, 그의 경험이 많이 녹아났고, 이후 자살을 위한 권총을 빌린 것과, 크고 작은 빚을 모두 청산하고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편지를 쓴 뒤 권총 자살한 점은 예루잘렘의 실화에서 가져왔다. 집안의 가업을 이어 변호사가 되었던 괴테였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오롯이 법과 윤리, 이성만으로 많은 것을 판단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예술적인 감성을 타고난 그만이 쓸 수 있었던 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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