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elle Sep 05. 2021

코 끝에 느껴지는 온도가 조금 선선해질 때

라가불린 LAGAVULIN

아침저녁으로 코 끝에 느껴지는 온도가 조금 선선해지면 나는 가끔 퇴근 후, 피트 향이 강한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나는 나무향에 미쳐있는 사람이다. 미쳐있다는 표현은 조금 강한 감이 있지만, 침대에 뿌리는 섬유 향수, 가끔 태우는 인센스, 몸에 뿌리는 향수까지 모두 베이스가 나무향이다. 여름에도 삼나무나 향나무향을 좋아하긴 하지만, 긴팔 옷을 챙기기 시작할 때 유독 조금 더 강한 나무나 장작이 타는 듯한 포근한 향으로 나 스스로를 감싸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나무향이나 장작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피트한 아일라 싱글몰트 위스키는 기호를 넘어선 종교와도 같다. 모든 아일라 지방의 싱글몰트가 피트향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은 섬의 위스키들의 대부분 바다내음과 피트를 가득 품고 있다. 바다내음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가자면, 저장소에서 숙성 중인 오크통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면 그 비릿한 내음을 한껏 머금었다가 천천히 위스키 원액에 스미게 한다. 이 향을 먼 한국에서 내가 그 바다 향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모든 과정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피트peat는 우리나라 말로는 이탄으로, 아일라 섬 전역에 널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연료이다. 이탄은 이끼나 해초등으로부터 유래된 약간 질퍽한 연료인데, 몰팅 시 이탄을 때면 몰트에서 특유의 나무나 장작향이 스민다. 아일라에선 워낙 흔한 연료이다보니 사용하게 된 것이 아일라 위스키의 강렬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각자 선호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일라 싱글몰트가 내는 약간의 짠기와 피트함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것처럼 신도들에게 내려지는 신탁 같은 면모가 있다. 다만 내가 앞서 말한 종교와 같다 함은, 기도문을 읊고 예쁘게 단장을 하고 일요일마다 교회를 찾아가는 종류와는 조금 다르다.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짙은 적막이 어울리는, 화려한 옷 보다 편안한 차림을 하고, 집에서 혼자 한 잔 마시는 술. 불교의 자기 수행과도 같은 그것이 피트 위스키의 매력이다.


투명한 빛깔의 8년 숙성 라가불린


나는 아일라 위스키들 중에서도 특히 이 고독하고 성스러운 매력을 가장 잘 품고 있는 위스키가 라가불린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취향의 영역이지만, 나에겐 아드백의 맹렬한, 야수 같은 스모키함과 라프로익의 강렬한 약품 향보다는 섬세한 라가불린과 보모어가 더 매력적이다. 수줍음이 많아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알고 보면 매력이 끝도 없는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약간 추울 때 혼자 잔을 기울이다 보면 문득,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에서 투박하지만 따듯한 담요를 둘둘 걸치고는 혼자 앉아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밤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8년 숙성보다 16년 숙성 라가불린을 먼저 경험했는데, 가볍게 식사에 곁들이려 한 잔 주문했다가 뭐 이렇게 복합적이고 맛있는 위스키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피트함이 절대 약하지는 않은데, 잘 숙성된 과실 향과 토양 향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서 마치 간이 너무 잘 잡혀 입에 넣자마자 감탄사를 부르는 요리 같은 느낌이었다. 이탄과 보리, 그리고 그 후 숙성과정에서 들어간 상쾌한 나무향과 과실 향까지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 심지어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렇다고 8년 숙성이 맛이 덜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처음에 피트 향이 알코올과 함께 약간 코를 훅 찌르기는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면 밑에서 가벼운 시트러스와 함께 나무향이 천천히 올라온다. 나무를 한껏 만지고 난 뒤에 손에 밴 듯한 기분 좋은 나무 향이 보리향과 함께 천천히 올라오는데, 꾸미지 않은 담백한 맛이 산뜻하다. 많은 위스키들이 달큰한 꿀 맛이나 바닐라 향을 강하게 낼 수 있지만, 외려 이렇게 담백한 맛을 내기는 어려워하는 것 같은 건 순전히 내 기호에 의한 편견인 걸까. 내가 질리지 않고 라가불린을 계속 찾게 되는 이유는 코 끝에 남는 담백한 그 나무향에 있는 것 같다.





Lagavulin

스코틀랜드 서쪽에 위치한 섬들 중 비교적에 남쪽에 위치한 아일라 섬(Islay)에 위치한 증류소이다. 아일라 섬은 지리적으로 아일랜드에 가까워 꽤 이른 시기부터 위스키를 만들어 왔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오랜 시간 퇴적된 해초들로 인해 만들어진 이탄 (peat)이 풍부해 특징적인 향이 강하다. 아일라 섬의 여러 증류소들 중에서도 킬달튼 (Kildalton) 트리오라 불리는 아드백, 라프로익, 라가불린, 이 세 증류소는 킬달튼이라는 마을에 사이좋게 서로 붙어있는데, 세 증류소 모두 피트 향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 세 증류소가 각각 수원지가 다르고 만드는 방식, 숙성 캐스크가 달라 서로 전혀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원할 때 술을 마실 수 있는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