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수고스러움이 주는 행복
나는 연구원이다. 심지어 꽤 미래 기술로 간주되는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 사람들은 으레 내가 최신 기술을 능수능란히 다룰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연구에 활용하는 분석 장비들과 몇 가지 소프트웨어 툴 이외에는 컴퓨터엔 영 소질이 없다.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새로운 전자기기를 손에 넣으면 네이버 검색창에 ‘– 사용법’, ‘– 초기 세팅’ 등을 검색해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테크 유튜버들이 소개하는 신기술들을 열심히 챙겨본다. 무슨 공대생이 그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몹시 다행히도 내 연구 분야는 AI와 같은 최신 기술과의 접목이 (아직까지는) 필수적이지는 않다.
디지털 기기들과 친하지 않아서 아날로그를 선호하게 된 것인지, 아날로그의 품이 드는 그 느낌이 더 좋아서 디지털 기기들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 것인지 그 인과 관계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나도 전자기기들을 풀소유하며 퇴근하고 나면 소파에 누워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고, 쿠팡에서 로켓 배송으로 생필품을 주문한다. 그래도 가끔, 평소보다 여유가 되면, 약간 귀찮을 짓을 사서 한다. 필름카메라를 챙겨 들고나가서 잘 찍혔는지 확인도 할 수 없는 사진을 찍고, 시계는 쿼츠가 아닌, 주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하는 오토매틱 시계나 손으로 태엽을 감는 핸드와인딩 시계를 착용한다.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담을 수 있는 가상 장바구니에 뭔갈 담는 대신 마트나 시장에 가서 실물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직접 집어든다. 내 손이 조금 더 닿고 움직일 때 드는 그 느낌이 더 오롯이 내 것이라고 느낀다. 수고스럽더라도 내가 품을 들이면 품을 들이는 만큼, 나에게 그 시간이, 그 가치가, 그 기억이 조금 더 진하게 남는다.
되돌아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 하기를 좋아했다. 전자사전보다는 종이사전을 펄럭이며 단어를 찾을 때 그 얇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촉감이 좋았다. 초등학교 때엔 그렇게 쓰기 싫어 매일 미루던 일기를, 중학교 때부터는 연필로, 펜으로, 만년필로 쓰기 시작했다. 매일 스케줄러에 할 일을 쓰고 체크 표시하는 게 좋았고, 그림을 잘 못 그려도 (필자는 중학교 시절, 학년에서 여학생 중 유일하게 미술 실습에서 D를 받은 사람이었다) 꾸준히 물감을 꾹꾹 눌러 짜내고 붓에 물을 적셔 붓질을 했다. 그 과정이 항상 어떤 방향으로든, 나에게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가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학부 졸업 후 아직 너무 아는 게 없는 듯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가는 곳이 대학원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원을 다니던 시기는 나에게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베이킹이었다. 대학원 시절, 새벽까지 실험을 하고 오면, 특히 실험이 잘되지 않은 날은 더더욱, 아무리 졸려도 꼭 뭔가를 굽곤 했다. 초콜릿칩 쿠키, 레몬파운드케이크, 진저브레드맨…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날 우리 집 팬트리 안 재료가 허용하는 레시피로 베이킹을 했다. 내가 하는 수행하는 연구는 직관적으로 성패 여부를 알기 어렵고, (눈에 보이는 실패는 그야말로 아주 제대로 망한 것이다) 결론조차 대부분 간접적인 결과물을 분석해서 도출하다 보니, 뭔가 성공하거나 실패해도 그 원인은 항상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계속 실험을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물에 신물이 났다. 하지만 베이킹은 시간을 들여 레시피만 정확히 따라 하면 꽤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보장했다. 베이킹은 그 과정이 상당 부분 실험과 비슷한데 결과가 보장되니, 실험이 망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날은 시간이 새벽 3시라도 그게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시기, 자연스럽게 빠져든 다른 취미는 시계와 필름카메라였다. 시계란 상당히 오랜 기간 완성되어 온 기계 공학의 정수로, 오토매틱 시계의 경우 배터리가 없어도 로터와 스프링, 기어 트레인 같은 정밀 부품들만으로 정확하게 시간을 표현할 수 있다. 필자의 주요 연구 분야는 이차전지로, 한창 배터리라면 신물이 나던 때 배터리 없이 오롯이 정확히 설계된 부품들의 움직임으로 정확한 시간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게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카메라의 경우는 조금 더 단순한 계기로, 남편이 쓰던 필름 카메라에서 사진 찍을 때 나는 정직한 ‘찰칵’ 소리에 꽂혀 필름 카메라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곤 하는 폰 카메라의 경박한 소리가 싫던 찰나에 필름카메라의 묵직하고 정직한 찰칵 소리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던 본인의 오래된 니콘 SLR은 조금 무겁긴 해도, 필름을 직접 로딩하고, 그 필름에 빛을 적당량 노출시키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그 작업의 재미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저 툭툭 찍는 것이 아닌, 한 장 한 장을 아껴 소중히 하는 그 과정이 좋았다.
요즘엔 뭐든 쉽다. 요리는 밀키트가 잘 나오고, 애플은 최근 아이폰에서 일기 앱을 출시해 누구든 언제나 폰으로 일기를 쉽게 쓸 수 있다. 아이패드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재료와 질감을 재현해 낼 수 있으며, 사진은 폰으로 편리하게 그리고 꽤 근사하게 찍을 수 있다. 편리함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며, 일상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아날로그를 사랑한다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쿠팡 로켓배송이 없다면 세상살이가 많이 힘들어질 것 같다.
다만 너무 쉽기 때문에 외려 가끔은 재미가 없다. 폰으로 툭툭 가볍게 찍은 사진은 너무 많이 찍게 되어 다시 열어볼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일기는 아무 때나 폰에 쓸 수 있어서 오히려 잘 안 쓰게 된다. 평소 바쁠 때엔 그렇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만, 가끔 그 편리성이 많은 즐거움을 앗아 간다. 여유가 될 때 맛있는 한 끼를 위해 재료를 손질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름을 로딩하고 와인더를 감는 과정에서, 모카포트로 불을 조절해 가며 커피를 뽑는 과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시간과 품을 들이는 만큼에 비례하게 남는 기억이 있다. 그런, 약간의 수고스러움이 주는 행복을 이제부터 공유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