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함께 저장되는 그 순간의 빛
내가 필름카메라에 빠져들게 된 첫 계기는 조금 어이없게도 ‘소리’였다. 사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즈음부터는 디지털카메라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터라, 소풍을 갈 때 엄마가 손에 들려보내 준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 이외엔 필름카메라를 접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몇 년 사이 필름카메라가 조금씩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찰-칵하는 기계식 셔터음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요동을 쳐 필름 카메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오랫동안 사진을 취미로 해오던 남편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나에게 자신의 손때가 묻은 SLR을 쥐여주면서 필름카메라에 입문하게 되었다.
때가 되면 필름을 로딩해줘야 하고, 매번 인화도 맡겨야 하는 이 귀찮은 기록장치를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집하는 이유는 필름 사진의 질감에 있다. 처음엔 단순히 셔터를 누르고(셔터음을 듣고), 레버를 당겨 필름을 로딩하는 행위가 재밌어서 시작했는데, 몇 롤씩 인화를 맡기며 점점 필름으로 찍은 사진의 맛을 알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손떨림 방지나 텍스트도 읽어내는 기술이 있는 세상에서 화질 떨어지는 필름 사진이 무슨 매력이 있나 싶겠지만, 빛이 감광제에 닿아 물리적으로 상을 잡아내는 필름 사진은 스마트폰 픽셀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샤프함과 감성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은 센서가 빛을 받아들여 읽어내는 시그널을 RGB값으로 전환한 신호일뿐이라면, 필름 카메라는 빛을 투과시켜 순간적으로 필름 위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긴다. 셔터를 누른 그 짧은 순간,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이 필름지에 그대로 전사되어 보존되는 것이다. 기록하는 그 장소, 그 순간의 빛이 필름에 고정되는 것만큼 낭만적인 게 어디 있을까. 현상이 끝난 네가티브 필름을 어두운 빛에 비추어볼 때 어렴풋이 보이는 그 실루엣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우린 늘 삶을 더 편하게 해 줄 편리한 것들을 추구하지만, 오래된 필름 카메라일수록 편의 기능은 더욱 없다. 70년대의 기계식 카메라들은 손떨림 방지 기능은커녕 노출계나 잡아주면 감사한데, 시중에 판매되는 중고들은 이마저도 고장이 나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구한 롤라이 Rollei XF35가 그런 경우였는데, 유일하게 있는 편리 기능인 노출계가 고장 나 반셔터를 눌러도 게이지 (정확히는 아주 얄팍한 바늘이다)가 움직이질 않는다. 이외에도 중고로 구한 카메라는 빛샘이 발생하거나 초점핀이 안 맞는 등 다양한 문제 있을 수 있는데, 심지어 이런 문제들은 사진을 찍어 인화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뭐 그러면 어떤가, 살짝 고장난 카메라라도 적당히 감으로 때려 맞춰 찍은 결과물들이 외려 더 재미있기도 하다. 기계식 카메라로 레버를 돌리며 필름을 로딩하면 그 로딩하는 맛에, 전자식 카메라로 찍으면 웨에엥하며 필름이 자동으로 로딩되는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툭툭 찍는 맛에, 약간은 랜덤한 결과물까지. 조금 귀찮아도 촬영하는 순간부터 인화할 때까지 재밌는 요소 투성이다.
순간을 그대로 새겨주는 경험을 시작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먼저 일회용 카메라를 써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일포드나 코닥에서 출시한 일회용 카메라를 선물하곤 하는데, 특별한 날 사진이 어떻게 찍혔을까 궁금해할 수 있는 설렘과 그날 찍은 사진들의 소중함을 함께 선물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혹 경험해 보게 된다면 찍을 때마다 기계식 셔터음도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고 현상한 네가티브 필름은 꼭 수령해서 간직하길. 그날의 빛이 반전되어 저장된 실루엣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새로운 기억 저장법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커버사진/ Leica C1, Kodak Ultramax, 2022, 이탈리아의 한 델리 집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