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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le Feb 13. 2024

오토매틱 시계

기어트레인으로 전달되는 운동에너지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손목시계는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다. 무의식 중에 가볍게 폰을 뒤집기만 해도 대기 화면에 크게 현재 시각을 표시해 주고, 차나 버스 안에서도 고개만 들면 쉽게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요즘엔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사람 자체가 흔치 않지만, 그중 체감 상 절반 이상은 스마트 워치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실험을 할 때엔 거의 항상 애플 워치를 쓴다. 다이얼에 시약이 묻어도 흐르는 물에 슥슥 닦을 수 있고, 양손이 바쁠 때 급히 온 연락이나 맞춰 둔 타이머가 알아서 진동하며 알려주니까. 고개와 손목을 마주 보도록 돌리기만 하면 시간뿐만 아니라 나를 찾는 이가 누구인지, 무슨 일로 찾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솔직히,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


애플워치가 실시간으로 심박수도 측정해주고 소모하고 있는 칼로리도 계산해 주지만, 실험이 없는 오늘 같은 날엔 주로 오토매틱 시계를 착용한다. 스마트 워치가 편리하기는 해도 손목을 바라보았을 때 스크린이 보이는 게 아직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나와 세상을 지속적으로 (지나치게 끊김 없이) 연결해 주는 게 조금 피곤하기도 하다. 이와 달리 일반 손목시계는 진동을 주거나 소리를 울려 나에게 뭘 알리지 않고, 내가 눈을 그쪽으로 돌리기 전까진 나에게 그 어떤 시그널도 먼저 주지 않는다. 내가 시간을 알고 싶을 때에 시간만을 알 수 있어 정보를 조금 더 내 의지에 맞게, 그리고 간결하게 전달받는다.


게다가 오토매틱 시계를 착용하면 배터리에 대한 불안도 없다. 쿼츠 시계는 몇 년에 한 번일지라도 갑자기 수명을 다해 멈추면 배터리를 갈아줘야 하고, 애플워치는 한번 충전을 잊었다 치면 배터리 잔량이 10% 남았을 때 강렬한 경고를 띄우며 절전모드에 들어가 애를 태운다. 반면 오토매틱 시계는 내 손목 움직임에 맞춰 스스로 태엽을 감으며 알아서 돌아간다. 타임 리저브가 좋은 시계들은 착용 후 벗어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시간을 맞춰줄 필요도 없다. 며칠 만에 집어들었을 때 시간을 한번 다시 맞춰주거나 태엽을 감아주는 수고로움만 잠시 감수한다면 이만큼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게 없다.   


집을 나서기 전 조금이라도 여유가 되는 날은 시계함 앞에 서서 핸드와인딩 시계의 크라운을 돌려 태엽을 감는다. 크라운을 돌릴 때 아주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내는 드륵-드륵- 소리가 이른 아침 내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준다. 물론 보통은 여유가 없어 주머니에 시계를 쑤셔 넣고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엽을 감곤 하지만, 그마저도 피곤한 출근길 막간에 즐길 거리를 주는 루틴이다.


시계 안의 스프링과 톱니바퀴들의 정교한 에너지 전달 체계는 늘 나를 매료시켜 왔다. 감히 말하자면, 순수 기계공학의 정수 같은 느낌이랄까. 오토매틱 시계의 작동 원리는 자동차의 파워트레인과 닮은 점이 많은데, 엔진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미션과 샤프트를 통해 바퀴로 운동에너지를 공급하듯, 시계도 메인 스프링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기어 트레인을 따라 밸런스 휠로 들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초침을 움직이게 된다. 작은 부품들 간 정교하고 섬세한 설계가 시침을 주기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움직이게 한다. 주기적으로 분리해 청소해 주는 (오버홀) 관리만 잘해주면 회로나 전자부품 없이도 수십 년, 수백 년을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운동에너지의 흐름은 크라운을 돌리는 내 손에 촉감으로, 다이얼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는 내 귀에 톡-톡-하는 소리로 전달되어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을 준다. 마치 어릴 때 피아노 위에 놓여 있던 메트로놈을 계속 손으로 밀어 작동시키던 느낌이랄까.


오토매틱 시계의 원리도 흥미롭지만, 사실 많은 오토매틱 시계의 미적 진가는 그 뒷면에 있다. 몇몇 오토매틱 시계는 그 작동 원리의 흐름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파이어 글라스를 활용한 투명한 케이스백을 많이 차용하는데, 이를 통해 시계 내부의 무브먼트 작동을 직접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토매틱 시계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손으로 크라운을 감는 느낌을 즐겨보고 싶은 이들에게, 눈으로 물리에너지의 이동을 좇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오토매틱 시계의 세상을 권한다. 오토매틱 시계는 합리적한 가격 (세이코 Seiko, 진 Sinn, 해밀턴 Hamilton 등)부터 손이 덜덜 떨리는 가격대 (예거 르쿨트르 Jaeger Lecoultre, 블랑팡 Blancpain, 피아제 Piaget 등)까지 다양한 가격대에 포진되어 있는데, 약간의 오버홀 비용만 감당한다면 중고로도 쉽게 입문할 수 있다. 우리 부부의 첫 오토매틱 시계는 세이코 SKX 시리즈 다이버였는데, 30만 원 대로 구할 수 있는 다이버 워치로 8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종종 착용하고 있다. 이후 고가의 브랜드 시계도 몇 종 수집하게 되었지만, 이 이상으로 시계 종류를 더 늘릴 계획은 당분간 없다. 지금 있는 시계들만으로도 시계태엽을 감거나 시간을 맞추는 즐거움은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


오늘의 wrist check: Seiko 5 필드 워치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의 손목 체크:

Seiko 5 필드워치 (7S26 무브먼트, 리뉴얼 전).


전설적인 가성비의 오토매틱 시계. 많은 부품을 공장에서 찍어내 케이스백이 화려한 시계는 아니지만, 간결하고 실용적인 시계의 매력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게다가 굉장히 가볍고 말도 안 되게 저렴하다. 리뉴얼 후 전반적으로 가격이 올랐으나, 여전히 입문용으로는 적절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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