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노엘 Nov 02. 2017

화가가 되고 싶어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출처: 네이버 





 이기적이었다. 


에이미 보시오. 
집 안은 다 잘 정돈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오. 앤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일러두었으니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진 않겠소.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함께 한 사람에게. 돈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벌 수 있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주었던 시간과 신뢰와 애정과 노력들.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 순간에 내동댕이치다니. 요즘 젊은이들도 하기 힘든, 모든 것을 박차고 무작정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용감무쌍한 모험심. 높이 산다. 그러나 그럴 거였다면 애초부터 누군가와 함께 하지 말았어야지. 갚아줄 수도 없고 되돌려 줄 수도 없으면서 타인의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락하다니. 예술가면 타인의 인생 정도는 장난처럼 짓밟아도 되는 건지. 함께 이룬 일상의 안정감 정도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하루아침에 무너뜨려도 되는 건지. 잔인하고 무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는 매력적이다.

 

 "아주 몰인정하군요."
 "그런가 보오."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창피할 것 없소."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라지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상관없어요."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는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 칠 수 있는 저 고집.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 뻣뻣한 자신감. 춥고 배고픈 거지 신세가 되어도 튼튼한 당나귀처럼 펄펄 뛰어다니는 강력한 에너지. 거기에 더해진, 결정적인 천재성. 꼬질꼬질한 여관방, 안락의자 하나 없는 빈곤함 속에서도 그는 미(美)를 볼 수 있었다. 한센병에 걸렸어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화가들은 그렇다. 찢어지게 가난하다. 옷은 더럽고 음식은 하루에 딱딱한 빵 하나 정도 먹을까 말까. 곰팡이가 퍼렇게 핀 빵도 아무렇지 않게 씹어 넘긴다. 물감과 종이 살 돈은 당연히 항상 없다. 무뚝뚝하고 고집 센 괴짜라는 수군거림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매일 혼자다. 제대로 된 가정도 없다. 귀여운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웃음소리, 힘든 하루를 마친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빛, 내일 하루를 또 준비하게 만드는 포근한 우리 집. 이 정도는 가지면 안 되는 건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삶은 고달프고 처량하다. 






 더위나 추위에 무지 민감하고, 배고프면 아무 일도 못하는, 도시의 깨끗함과 편안함을 떠나 더럽고 불편한 시골에서의 생활은 상상하기도 싫은 나는, 그래서 화가가 되지 못하나 보다. 허허벌판에서 쥐들과 뒹굴며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벌레 하나에도 기겁하며 소리를 지른다. 색다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달리 봐야 하는데, 자신이 본 세상을 위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런 용기가 없다. 내 처지를 비웃는 사람들의 조롱 섞인 눈빛을 가뿐히 무시해야 하는데 나는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뼛속까지 아프다. 그래서, 나는 화가가 될 수 없는 거다. 화가는 꼭 그래야만 될 수 있는데….  


 그러나 마음 속 저 깊은, 솔직한 곳에는 화가인 내 모습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화가가 되는 날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 본다. 화가처럼 미쳐보는 날. 이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소용 없다는 강력한 끌림.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기막힌 뚝심. 조롱하는 비웃음을 되려 부끄럽게 만드는 뜨거운 눈빛. 


 내 인생에도 단 한 번, 화가가 되는 날이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