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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Oct 12. 2018

그래도 사랑해 주세요

마담 보봐리 -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봐리즘


허영심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자기 암시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을 실재하는 자신과 다르게 여기는 정신분석학적 용어. 현재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를 구하면서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곳과는 다른 곳에 있으려 하는 욕망.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꿈에 대한 환상 속에 사로잡혀 실제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는 망상.



자신을 사랑해주는 우직한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바람둥이, 호색한 등의 거짓 애정을 좇다 끝내 파산, 음독자살에 이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 보봐리 부인의 허영심과 헛된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 그리고 보봐리 부인처럼 아직도 자신의 현재와 분수에 만족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정신분석학적 전문용어.


그래, 엠마는 그런 여자였다.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상류층 부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들의 화려한 파티를 그리워했다. 그녀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으며 그럴 만한 자질이 있다고 믿었다. 불륜과 정사 속에 눈이 멀어버린 부정한 여자. 자신을 위해 이사도 하고 새로운 수술에도 도전하고 극진히 병간호도 했던 남편을 그저 따분하고 야망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 어리석은 사람. 그녀는 나쁜 여자였고, 인간의 미성숙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유치한 여자였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과 전문가들은, 그리고 심지어 평범한 독자들까지도 그녀의 허욕을 비판하고 이 기회에 자신의 삶에 감사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그녀를 한 번쯤은 이해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살며시 입을 떼 본다.


그 시대에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은 상류층 사회뿐이었고
그곳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남자의 사랑'이었으므로.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의 손에서 놀아난 게 아니었을까. 당시 여성이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져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기란 참으로 '허망한 일' 아니었을까. 매일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나라로 여행을 가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새로운 도시를 돌아다니며 처음 만나 본 사람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마음껏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파티에서 본 수많은 상류층의 여자들. 그녀들의 화려한 옷과 값비싼 목걸이들이 탐났을 수도 있다. 왜 안 그랬겠는가. 그녀는 어리고 아름다웠는데. 그녀의 손톱은 하얗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으며,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그윽했다. 상류층 여자들이 누리는 것들이 부럽고 탐이 났고, 그것을 얻으려면 보다 능력 있는 남자의 사랑이 있었어야 했다. 그녀의 사치와 불륜은 그렇게 시작된 게 아닐까.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고작 결혼이 전부였다는 그런 페미니즘적 논의가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엠마의 허물을 덮어주면 안 되는 걸까. 그래, 그녀는 허영 덩어리였고 능력도 없었으며, 그런 주제에 더 높은 것을 꿈꾸는 망상의 소유자였다. 그러면 엠마는 우리로부터 사랑받으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사람은 모두로부터 항상 외면당해야 하는 걸까. 네가 잘못했으니 손가락질받고 비판받다 마땅하다며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다. 우리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도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타인으로부터 따뜻한
애정을 받기 원하고 누군가 자신의 결점까지도 감싸 안아주길 바란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확률은 점점 줄어든다. 어린 아기였을 때는 그저 밥을 먹거나 웃기만 해도 모두가 사랑의 눈빛을 보내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승진을 한다거나, 실적을 낸다거나, 소위 훌륭한 일을 하거나 고상한 인품을 보여줘야지만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애정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무엇인가를 잘못한다거나 무능하다거나 미성숙한 행동을 보이면 모두로부터 외면당한다. 어쩌면 그래서 어른들은, 날이 갈수록 외롭고 고독해지고 추워지는 게 아닐까.


뭐, 그래서 인류는 서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둥 박애정신이 필요하다는 둥,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리고 픽션 속에서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지만 엠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냉엄한 정죄 속에서 혹시 아프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는 것뿐이다. 어쩌면 엠마는 죽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온기를 그렇게나 바랬을 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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