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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Jan 08. 2019

아름다운 말들.  

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이 만져봤으면 좋겠어


진실을 눈썹처럼 만진다니. 시인은, 모든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사람.

  

한 장의 그대 사진과 라일락나무와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했으면 좋겠어   


사랑이 이와 같다면. 약혼과 결혼, 누군가와 발 맞추는 것이 라일락 향기와 같이

은은하고 달콤하고 조용하다면.

  

생에 그리고 사랑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흰 치아 몇 톨이 보인다
질투와 연민으로 가슴이 에인다


5살 배기 조카를 보고 있으면, 때 묻지 않은 깨끗함에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조카가 앞으로도 지금 모습 이대로 티 없이 맑기를, 내가 겪었던 아픈 일들을 끝끝내 알지 못하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표현들.

  

그게 실은 내 본성인가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이런 때가 있다, 나도.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좌절하는 자세라니. 어떤 모양일까. 바닥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후 이마까지 바닥에 대는 아기 자세일까. 아니면 거꾸로 매달리는 물구나무 자세? 그것도 아니면 소파에 엿가락처럼 늘어지게 앉아 있다가 그나마도 힘이 없어 옆으로 털썩 눕게 되는 그 순간일까. 좌절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것이 좋기까지 하다니. 시인이 정의하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어떤 모양일까. 내가 뽑은 최고의 구절이다.

 

세상 일들 무얼 믿고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언제나
오직 불행이란 풀언덕을 믿고서였다


그래서, 삶은 조금 슬프다.

  

배반의 총보다 권태의 장미가 더 불길해
얼굴을 뜯어고치고 싶어 치욕이 더는 못 알아보게


시인의 말에는 평가나 해석이 필요치 않다. 그저 조용히 음미하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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