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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Jun 07. 2021

회사를 그만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 피부 같았던 오래되고 익숙한 옷을 벗어버리기.

어릴 적, 가수 이적님의 어머니이자 여성학자이신 박혜란 님께서 쓰신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마흔 살이 되면 새로운 시작을 하자고 말이죠.


제 나이 39살. 또 다른 대학원에 합격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작년에 입학한 산업공학과가 흥미롭지 않아서 1학기 마치고 난 뒤 몇 군데 새로 지원을 했었거든요.  

현재 직무와 같은 마케팅 전공, 여기를 나오면 과연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냥 지금 하는 일과 결국 똑같은 건 아닐까.. 고민은 됐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고,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해보았습니다. 혹시 모르니 회사에는 혹시 학업 휴직 또는 배우자 해외 근무 관련 휴직이 가능한지 문의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화요일 휴직이 불가하다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이달 30일이면 꽉 채워서 13년을 근무한 직장. 청춘을 불살라서 일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26살부터 저의 청춘이 이 회사와 함께 해왔네요. 남편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내내 회사를 다녔으니 말입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회사이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어느새 회사가 나 같아져 버렸습니다. 회사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회사는 오랜 입은 옷 같아.
엄청 마음에 들거나 비싼 옷은 아닌데, 너무 오래 입어서 익숙해져 버린 옷.
가끔 이 옷이 내 피부에 붙어버린 것도 같아서 옷을 벗기가 겁이나.


이 옷을 벗은 내가 어떤 사람일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입으로 그만두겠다고 말해놓고도 잘 실감이 안 나네요.




퇴사를 결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 내적으로는

반복되는 일이 지겹고,

의미나 보람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하고,

회사 내에서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회사 외적으로는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방치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쳤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점점 커가는데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어지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챙겨주는 것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갈수록 퇴보하는 첫째의 영어실력에 초조해져서 자연스럽게 영어 노출을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사실 첫째가 3~4살 때 알파벳 다 알고 파닉스의 원리를 터득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언어천재인 줄 알았다죠. 근데 6살인 지금 알파벳 순서를 헷갈리고 있네요.)




막상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했을 때 아쉬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


1. 근속연차에 따라 연 21일로 늘어난 휴가. 내년이면 22일(+여름휴가 5일)

2. 실비보험 혜택(온 가족)

3. 버스 한 번으로 40분 내에 도착하는 출퇴근길

4. 점심시간에도 문화와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입지조건 (광화문)

5. 쉽게 얻어지는 화장품과 생활용품들

6. 나의 소속.

7.내가 벌어서 내가 쓴다는 떳떳함(?)



반면에 그만둔다고 생각했을 때 좋은 건 이런 것입니다.


1. 매달 느끼는 매출의 압박, 반복되는 업무에 느끼는 지겨움, 학습화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것

2. 아이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아마도?)

3.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4. 육아 부담을 남편과 함께 하고 부모님께 신세를 덜 지는 것

5.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합니다. 섭섭했다가 시원했다가 좋았다가 슬펐다가 요동을 치네요.


일단 7월 초라고 이야기는 해놨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 떠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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