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현실 6
12월 초, 겨울이 입사한 지 4개월 차로 접어들었다. 전 담당자가 급하게 퇴사하는 바람에 업무인수인계를 못 받아 고생하던 겨울도 어느 정도 업무파악이 되었다. 겨울이 처음에 왔을 때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알고 보니 법인장이 겨울을 뽑았을 때는 오랫동안 법인장을 하던 현지직원 대신 부임한 지 고작 반년도 안 되었던 시점이었다. 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 같은 새 법인장에게 법인의 직원들은 아직 큰 유대감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리더로서 어떤 조직을 이끄는 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자신을 모르는 낯선 조직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지금 와서 돌아보니 법인장은 불안정한 본인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겨울을 채용한 것 같기도 했다. 자기 입맛대로 움직일 사람을 심어서 수족처럼 부리기 위해.
법인장은 법인에선 사장과 다름없다. 비록 본사와 유럽지역본부의 입김이 강하긴 하지만, 인사권과 의사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능력을 보여서 따르게 만들 수도 있고, 방향을 잘 제시하고 아랫사람들을 잘 아우러서 끌고가는 게 가장 이상적일 리더쉽일 것이다. 이 법인장이 택한 방법은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나 보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치우고,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대체해서 자신이 권한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방법말이다. 미용기기를 담당했던 전 담당자는 원래 기획담당이었다. 겨울이 입사하기 1년 전, 본사의 지시로 미용기기 판매를 시작하면서 전 법인장이 그에게 추가 업무를 줬지만, 메인 업무는 기획이었다. 기획담당은 법인장과 가장 긴밀하게 소통해서 각종 자료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는 스웨덴 사람이었다. 그전에는 법인장도 스웨덴 사람이 큰 문제가 없었다. 모든 문서는 영어로 도착했고 자료도 영어로 만들었으며 보고도 영어로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한국인 법인장이 온 게 아닌가. 본사에서 온 자료가 한국어, 영어 버전 두 개가 있으면 한국어버전을 열어보고, 본사에 보고도 한국어로 해야 하는 한국인. 그러다 보니 새로 온 법인장 눈에 기획담당이 거슬렸다. 당장 일을 시키고 싶은데 한국어로 된 자료만 있으면, 내용을 일일이 기획담당에게 영어로 설명해 준 뒤 일을 시켜야 했다. 보고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어로 써서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면 일단 기획담당에게 시키고는 본인이 다시 한국어로 바꿔야 했다. 게다가 매일 급한 법인장과 달리 기획담당은 아이들 픽업이니 병원 예약이니 하는 이유를 대며 필요한 순간에 자꾸 없어졌다. 역량도 태도도 마음에 안 들어하던 차에서 한국에서 일을 하다 온 겨울이 지원을 한 게 아닌가. 법인장은 딱 적당하다 싶었다. 때마침 기획담당의 계약기간도 끝나가고 있었던 터라, 계약을 종료 통보하고 인수인계를 시킬 예정이었다.
그 과정이 법인장 생각대로 스무스하게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약직이지만 4년 넘게 같은 업무를 담당하던 그에게 계약 종료 통보는 당연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전해 듣기로는 계약 종료 전까지 어떤 언질도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겨울이 미용기기 담당자라고 입사해서 인사를 다니던 입사 첫날까지도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미용기기 맡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법인장을 찾아가 물었더니, 이야기가 기니까, 미팅시간을 잡고 얘기하자고 다시 부르겠다더니 계약 종료 계약서에 서명을 시킨 것이었다. 당장 한 달 반 후에 직업을 잃게 생긴 그는 언성을 높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로 조퇴를 하고 돌아갔고, 계약 종료일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받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급한 대로 법인장은 본인이 아는 한도 내에서 겨울에게 히스토리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몇 개의 보고 자료로 던져줬다. 그리고 난 뒤에는 오로지 겨울의 능력이었다. 유럽법인에 있는 담당자들에게 문의해서 업무시에 사용해야 하는 시스템들의 리스트를 받고 매뉴얼도 전달받았다. 겨울 앞에 앉은 주재원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했고, 현채로 오래 일하신 또 다른 한국인 팀장님에게 부탁해서 시스템을 익혀갔다. 유럽법인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도 받고, 회사 웹디스크를 뒤져서 기존에 만들어진 자료를 찾아내서 읽어갔다. 회사 시스템이 익숙해지면서 매출이니, 물류현황 같은 데이터를 내려받아 분석하면서 감을 익혔다.
그러는 와중에 법인장이 업무는 실무로 익히라며 지시한 유관부서들과의 주간미팅을 소화해야 해서 더 정신이 없었다. 일단 하라고 해서 사람들을 모아놓기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는 것도 없으니 처음에는 발가벗고 전쟁터에 나가는 느낌이었다. 미팅 때 분위기는 부서들마다 달랐는데, 고객서비스 부서의 경우에는 꽤나 호의적이었지만, 홍보팀은 날이 서있었다. 어색함을 감추로 억지로 웃느라 입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4개월 차가 된 지금, 이제 더 이상 어떤 업무도 더 이상 큰 돌덩이처럼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일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업무가 파악되니 또 다른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일은 더 많아질 뿐 적어지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입사하기 전, 법인장이 직접 겨울의 미용기기 팀, 팀장의 업무를 설명해줬었다. 직속으로는 다른 팀과 함께 나누어 쓰는 디맨드 플래너 한 명뿐이지만, 미용기기를 담당하는 영업지원팀 담당자와, 마케팅 담당자 그리고 고객서비스 담당자까지 겨울의 팀 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었다. 그렇게 따지만 4명 정도의 팀원을 가지고 있는 팀의 팀장인 셈이었다. 한국에서는 팀장을 해본 적이 없던 겨울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오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입사하고 난 뒤에 실상은 달랐다. “다른 팀”의 담당자는 겨울의 팀과 업무협조를 할 뿐, 겨울의 지시를 받거나 보고를 받는 팀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다른 품목도 함께 담당하는 디맨드 플래너까지 고작 1명 조금 넘는 맨파워만 있는 팀이었건만, 하라는 일은 넘쳐났다. 서울에 있는 본부에서 볼 때나, 유럽 지역본부에서 볼 때는 팀원이 7명이 있건, 1명이 있건 똑같이 한 법인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