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현실 4
아이들이 커져서일까, 아님 체력의 차이일까. 겨울이 혼자 한국에 있을 때는 차 타고 한 시간 거리인 동물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는데 선우는 혼자 애 둘을 데리고 기차로 5시간 거리인 코펜하겐을 다녀왔다. 커졌다고는 하지만 만 6세, 만 8세 어린이 둘과의 5시간씩 막힌 공간에 있는 건 쉽지는 않기는 했나 보다. 기차 여행을 시켜주고 싶다고 갈 때는 기차, 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올 때 비행기를 예약하길 천만다행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애들은 재밌었는지 돌아와서 한동안 겨울에게 인어공주 상을 본 이야기며 놀이공원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토할 뻔한 이야기를 까르르 웃으며 했다.
“엄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번에는 엄마도 꼭 같이 가자!”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있을 때 가장 큰 대목은 설, 5월, 추석이었다. 20대 타깃인 브랜드나 매장의 경우에는 밸런타인 데이나 크리스마스 시즌도 매출이 움직이긴 했지만, 한 해를 좌지우지할 만큼은 아니었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소비자 입장에서 해외직구하는 날이었지, 물건을 파는 날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웨덴에 오니 조금 달랐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크리스마스시즌과 더불어 한해의 매출을 좌우하는 큰 행사였다. 겨울이 입사한 해에 본사에서 중점사업으로 미용기기를 지정할 때, 또 다른 성장의 축이 온라인 매출 향상이었다. 점점 온라인 마켓이 커지기 시작한 유럽시장에서 블랙 프라이데이는 입점 매장수가 많지 않은 미용기기가 눈이 띄는 성장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게 유럽 지역본부의 의견이었다. 영국과 독일, 스페인 같은 큰 법인들은 이미 서너 달 전부터 행사품목을 선정해 생산을 진행하고 디지털 광고 계획을 세우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에 들어갈 동영상과 사진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2달도 안 남은 시점에 갑작스럽게 겨울이 있는 스웨덴 법인도 해당 온라인 행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행사 품목 리스트를 공유하라고 메일이 왔다.
스웨덴에 겨울이 담당하는 미용기기가 들어간 오프라인 매장수는 아직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나뿐인 영업사원이 포기하지 않고 화장품과 전자제품 체인들을 꾸준히 만난 덕에 블랙 프라이데이에는 몇 개의 행사공간을 약속받은 상황이었다. 흔히 말하는 대목시즌에는 다들 기다렸다가 사나 싶게 일반적인 날에 비해 몇 배의 매출이 나온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만나는 행사매대는 일반적인 진열장에서 일어나는 매출에 몇 배가 나는 자리였다. 그래서 대목시즌에 행사매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제조사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유통업체 입장에서도 어떤 제품을 넣느냐에 따라 목표를 달성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 때문에 까다롭게 굴었다.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는 작년에 출시되어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제품을 50% 가격에 독점 공급하는 조건으로 E 전자제품 유통에 평소 판매되는 양의 20배가 넘는 주문을 받아놓았던 상황이었다. 이것만 다 팔아도 올해 목표의 90% 이상 달성하는터라 겨울은 기대가 컸다.
그런데, 2달도 안 남은 시점에 유럽법인 주체로 하는 온라인 행사에 참가하라니 당황스러웠다. 일단 행사를 하려면 팔 재고수량이 필요했고, 많이 팔려면 눈에 띄는 혜택이 필요했다. 할인을 많이 하던지 눈이 돌아가는 사은품 같은 혜택말이다. 다른 시즌과 다르게 블랙프라이데이는 사은품은 거의 효과가 없는 시즌이었다. 사고 싶은 품목을 안 사고 기다렸다가 최저가로 주는 곳에서 사는 게 바로 블랙 프라이데이였기 때문에, 무조건 가격이 중요했다. 결론적으로 싼 가격으로 팔 충분한 재고가 필요했는데, 중국과 한국 공장은 배송시간을 고려하면 당장 생산해도 일정을 맞출 수 없을 뿐 아니라, 체코와 폴란드 공장은 이미 걸려있는 블랙프라이데이 물량만으로도 공장이 과부하상태였다. 결국 행사를 하려면 오프라인으로 팔기로 했던 물량을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판매 물량을 확보한다 해도 판매가격이 문제였다. 비싸면 안 팔릴 테고, 싸면 오프라인 판매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오프라인 판매에 영향을 준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유통업체와 껄끄러운 일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현재 매출이 대부분이 오프라인으로 나오는지라 매출을 더 키우겠다고 유통업체를 구워삶으려고 애쓰는 상황에 괜한 미운털 박히면 올해 매출은 물론 내년 매출도 위험했다.
이런 사정을 말하며 겨울은 법인장에게 이번 유럽 법인 온라인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보고했다. 말을 하는 내내 다이어리에 내용을 적어가며 듣던 법인장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 행사 참여하면 본사 돈으로 광고비 지원해 준다는데 방법이 없나요? 우리 법인 광고비 예산 없는 거 알죠, 이게 기회라고. 그리고 위에서 하라고 할 때 잘 따라주는 모습 보여야 다음에도 또 기회가 오지, 이렇게 단칼에 잘라버리면 다음에는 물어보지도 않는다고. ”
“그렇긴 한데, 재고 문제도 있고, E사와의 관계 때문에 이번에는 좀 애매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출은 이미 세팅된 걸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거라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게 매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국에서 회사 생활 해볼 만큼 해본 사람이 왜 그래. 유럽 지역 본부와 관계를 어떻게 쌓느냐가 앞으로 업무 협조나 예산 분배에 다 연결되는 거라고. 유럽에서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런 제안을 한 걸 텐데, 최대한 되는 방향으로 고민해서 가져가야지, 이렇게 안 된다고만 하면 안 된다고.”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매출과 내년도 매출을 생각한다면 이번 오프라인 행사를 성공해서 E사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내년도 매장수와 진열 공간을 늘리는 게 답이었다. 그런데, 원래 계획이 모두 틀어지는데도 위에서 시킨 걸 억지로 껴넣을 방법을 찾아내란다. 겨울은 혼란스러웠지만, 겨울의 평가자는 법인장이었고 아직 수습기간 중이었다.
“유럽 담당자랑 좀 더 얘기해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직 인지도도 약한 미용기기 사업에 쇼핑몰로써는 트래픽이 거의 없는 홈페이지에서 판매해야 하는데 거기에 가장 많은 광고비가 지출된다는 블랙프라이데이였다. 과연 우리 제품이 온라인에서 보이긴 할까? 구글에서 미용기기를 치면 첫 줄에 보이게 하기 위해는 구글에 검색광고비를 내야 했다. 구글에서 보이는 조그만 공간이 모두 엄청나게 비싼 매대나 마찬가지였고 그 매대 비용은 정가가 아니라 경매처럼 결정되었다. 본사에서 광고비를 지원해 준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돈 낭비처럼 보였다. 일정, 매출, 이윤, 유통업체와의 관계, 어떤 면으로 봐도 안 하는 게 맞는 제안 같았지만, 하라고 하지 않는가. 겨울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따르는 수밖에.
결국, 독일 법인에서 장기재고로 가지고 있던 물량을 가져와서 온라인 행사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했다. 할인율은 E유통의 행사와 마찬가지로 50%였지만, 품목 자체가 북유럽에서 판매된 적이 없는 품목이라 리뷰가 독일, 영어, 스페인어로 된 것뿐이었다. E유통에서 할인율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면, 너네한테 준거는 베스트셀러 제품이고, 이건 인기가 없는 거니 매출 영향 없을 거라고 변명하면 될 것이다. 법인장이 품목을 가지고 딴지를 걸면, 지금 급하게 구할 수 있는 물량이 이거뿐이었고, 다음 달 입고되는 물량은 이미 E유통과 선계약된 물량이라서 계약위반으로 페널티 문다고 설명할 요량이었다. 비록 독일 법인에서 장기 재고로 가지고 물량이었지만, 작년 블랙프라이데이 때 꽤나 잘 팔렸던 품목이었다는 것도 덧붙이며 말이다. 마음 한 구석에는 높은 할인율에 독일에서 재운송비, 거기에 광고비까지 생각하면 원가도 안 남는 장사라는 게 계속 걸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