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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야근

이민자의 현실 3

by 노랑연두

”여보, 애들 가을 방학 때 어떻게 할까? “


이주 전쯤 선우가 물었었다. 아이들의 가을 방학은 무려 일주일. 입사한 지 만 3개월로 접어드는 10월 마지막 주에 있었다. 겨울은 다른 부모들처럼 선뜻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우기가 망설여졌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기도 했지만, 1년 중에 가장 큰 행사인 블랙 프라이데이가 4주밖에 안 남은 시점이라 할 일이 많기도 했다. 다행히 Fritid라고 불리는 돌봄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학교에 보낼 수는 있었지만, 재단이 같은 다른 학교와 합쳐서 운영하는 탓에 낯선 학교로 가야만 했다. 아무리 하준이와 하린이가 함께 간다고 해도 새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된 둘째 하린이에겐 너무 무리처럼 보였다.


”아직 수습기간이라서 휴가 내기 좀 그러면, 내가 휴가 내서 애들 데리고 놀러 갔다 올게. “


선우의 제안에 겨울은 미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업무에 익숙해지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빨리 이 회사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무사히 수습기간을 넘기려면, 그리고 빠르게 업무를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오래 붙잡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낯선 나라, 낯선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겨울은 그렇게 믿었다.


회사가 사고 벌어졌대도 알 수 없는 외진 곳이라 매번 웬만하면 늦지 않게 나오려 마음을 먹지만, 법인장이 붙잡아놓는 날이 아니라도, 겨울은 하던 일을 쉽게 끊고 나오지 못했다. 5시쯤 될 때면 한 30분만, 아님 한 1시간만 더 하면 하던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만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 하준이의 축구와, 둘째 하린이의 피겨가 겹쳐서 한 명씩 맡아 데리고 가야 하는 목요일을 빼고는 거의 야근을 하고 있었다. 늦게 회사를 나섰다가 아주 가끔씩 지나가는 행인을 만나면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고 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서.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선우가 아이들을 저녁을 먹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은 잽싸게 옷만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 공부를 봐줬다. 7세 고시, 학원 뺑뺑이, 과도한 선행과 끝없는 경쟁이 싫어 스웨덴에 왔다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마냥 놀릴 수는 없었다. 하준이가 만 6살 되는 해 8월, 학교에 들어가서 만 7세가 되는 5월까지 F학년에서 배운 걸 가져왔는데, 그게 고작 줄 긋기와 알파벳 쓰기, 1부터 9까지 숫자인 걸 보면서, 그 의지는 더 강해졌다.


’적어도 수학과 국어는 한국 진도에 맞게 때 줘야지. 언제 다시 한국에 돌아갈지 모르니.‘


그게 겨울이 스웨덴까지 와서 아이들에게 한국교과서를 저녁마다 풀게 시키고 한글로 일기를 쓰게 이유였다. 9시가 되면 아이들 목욕을 해주고 짧게 책을 읽어주며 아이들을 재웠다. 그러고는 이틀에 한번 꼴로 컴퓨터를 켰다. 접속할 때마다 5분은 기다려야 하는 크라우드 피씨가 이럴 때는 참 편했다. 회사를 가지 않아도, 굳이 노트북을 챙겨 오지 않아도 어디서든 시스템에 접속하면 작업하던 화면 그대로 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집에 와서 일할 거라면 회사에서 늦게까지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왜 굳이 그 시간까지 회사에 앉아 있다가 와서 다시 컴퓨터를 켜는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쉬려고 누우면 자꾸 머릿속으로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가 다음날 있는 미팅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업무 시간 내에 집중해서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해야겠다 싶어 일어나고 말았다.


‘아직은 업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덴마크 영업사원들과의 함께 한 화상 미팅이 끝나서 자리로 돌아가 앉았는데, 휴대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이제 애들이랑 코펜하겐에 도착했어’

방금 전까지 덴마크에 있는 사람들과 미팅을 했는데, 그 사이에 선우와 아이들은 덴마크의 수도에 도착했나 보다. 아이 둘을 데리고 여행을 간 선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덴마크 영업 사원들 얼굴 보고 인사도 할 겸 출장 간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겨울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간다고 해도 어차피 영업사원들이 코펜하겐에만 있는 게 아니기도 했고, 코펜하겐에는 따로 미팅을 할 만한 사무실도 없었다. 얼굴을 볼 목적이라면 영업사원들을 스톡홀름으로 부르는 게 맞았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나도 한국에 있을 땐 혼자 애들 데리고 다녔잖아.’

기러기 독박육아 시절을 생각하며 애써 미안한 마음을 지웠다. 어쨌든 여행 간 3박 4일 동안은 자유다. 더 이상 애들이 기다릴까 걱정하며 일을 마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좀 있다가 3시에 있는 미팅까지 하면 4시가 좀 넘으리라. 그때부터 늦게까지 미팅을 하느라 못 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늦으면 위험하니 적당히 하다가 집으로 가서 마저 해야지. ’

적어도 3일은 걱정 없이 늦게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울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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