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현실 5
애들 가을 방학이 지나고 11월이 되자 회사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블랙프라이데이가 있는 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블랙 프라이데이는 11월 4번째 주 금요일이었지만, 점점 행사기간이 기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많은 유통채널이 블랙프라이데이 전주 토요일부터 블랙 위크라는 이름으로 일주일간 행사를 했고, 올해는 3번째 주 월요일부터 선공개하듯 멤버십이 있는 고객 대상으로 세일 품목을 공개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블랙프라이데이가 있는 4번째 주 월요일부터는 본격적인 블랙위크 세일에 들어갔다.
행사를 앞두고는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생산 및 입고를 챙겨야 했다.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는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4개국 만의 행사가 아니었기에 생산부터 빡세게 챙겨야 했다. 공장에서는 몇 달 전부터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수량을 취합해서 생산계획을 짜서 원자재와 내부 부품을 수급했건만, 늘 그렇듯이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출몰한 해적 떼 때문에 선박운송이 한 달 이상 지연되기도 했고, 협력업체 공장의 케파 문제로 일정을 못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수량 취합을 같이 받았으면서 치사하게 큰 법인 위주로 물량을 배분하려는 낌새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생산 발주를 담당하는, 하나 뿐인 팀원의 일을 대신하다시피 공장과 이야기를 하며 물량을 제때 들어오게 하려 애를 썼다. 그 모든 물량이 11월 첫째 주에 들어왔고 내부적인 품질체크 후 바로 유통채널로 납품되면, 거기서 다시 각 매장으로 이동해 진열될 것이다. 거기에 유통업체와 연결한 홍보도 챙겨야 했다. 행사 1주 전부터는 티저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에 돌려서 브랜드도 알리고 미리 회원 가입해 행사 알람을 받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행사 전날부터는 실제 할인하는 제품과 할인가격, 구매 바로 가기 링크를 넣어 실제 매출이 발생할 수 있도록 광고를 돌렸다. 구글 검색 광고에도 비용을 집행해 행사 제품이 상위에 노출될 수 있도록 했으며, 각 제품별로 상세한 설명을 북유럽 4개국 언어로 번역해서 태그를 달아 일반 검색 시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도록 밑작업을 해놨다.
거기에 유럽지역본부 행사까지 챙겨야 했다. 유럽지역본부에서는 통일된 메시지를 주고 각 법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홍보와 판매페이지를 유럽 20개국 동일한 레이아웃을 적용해 제작해 제공하며, 광고비 집행도 일괄로 하여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스웨덴 법인처럼 추가로 선정된 법인들은 준비기간이 짧으니 최대한 지역본부 주체로 만들어서 뿌리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나라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달랐기에 결국 만든 광고나 판매페이지는 법인에서 재검토를 해야 했고,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행사 하나 하려면 판매용 리플릿이나 판매페이지에 있는 설명에 있는 문구를 수정하는 걸 최소 두세 차례는 해야 했다. 단일 언어를 쓰는 한국에서도 그런데, 각기 다른 언어를 유럽은 오죽하겠는가. 끝없이 나오는 오타를 수정해 달라고 메일을 보내면 어떤 건 수정이 되고 어떤 건 그대로라서 또다시 수정요청 메일을 써야 했다. 지역본부에서는 과부하가 걸렸는지 며칠씩 아무 답변이 없을 때도 있었다. 회사 홈페이지도 문제였다. 하루에 한 개가 팔릴까 말까 하는 홈페이지라 주문이 몰리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감도 안 왔다. 그래서 온라인 채널 담당, 고객서비스 담당자, 물류 및 배송 담당자까지 모여 시뮬레이션을 하며 대책을 세웠다. 겨울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 행사 시작 전까지 매일 아침 진행사항을 업데이트해서 법인장을 비롯한 관련자에게 공유했다.
나라는 다르고 산업이 조금 바뀌었어도, 업무는 예전에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중간중간에 본사와, 유럽지역본부, 법인장, 법인의 다른 직원 사이에 껴서 생기는 괴로움이 클 뿐이었다. 본사와 유럽지역본부는 갑자기 당장 내일까지 자료를 달라고 해서 야근을 시키더니, 그 뒤로는 함흥차사더니 한참 뒤에 또다시 급하게 다음 일을 요청했다. 그런 진행 속도가 겨울은 익숙했지만, 현지 직원들에겐 아니었다. 당장 내일까지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문구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법무팀은 최소 2주 전에 요청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이미 다른 직원들이 검토를 요청한 서류들이 2주일치가 쌓여있으니 순서대로 해야 한다며 말이다. 그 속도를 맞추면 블랙프라이데이가 끝난 뒤에나 행사 문구가 올라갈 판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늦어도 1주일이면 모든 검토가 끝났었다. 급한 건이라고 사정하면 한두 시간 만에도 검토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웨덴의 속도는 달랐다. 모든 건 미리 예약되어 계획에 들어있어야 했고, 당장 급한 일 따위가 미리 세워진 계획을 망칠 수 없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였다. 광고를 주려면 회사시스템에 업체가 등록되어 있어야 했다. 그래야 시스템을 통해 발주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업체는 비용 집행을 할 수가 있었다. 업체를 등록하려면 업체의 사업자등록증이니 계좌, 신용도 등의 자료들이 필요했다. 부실한 업체와 계약해서 생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절차들이었다. 업체로부터 자료를 받아서 담당부서로 넘기면 며칠 후에 일부 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피드백이 왔고, 그 피드백을 다시 업체로 넘기면, 또 며칠이나 걸려 새로운 자료가 왔다. 그리고 다시 담당부서에 보내면 확인할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서류 몇 장에 몇 주가 금방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검토하는데 30분도 안 걸릴 거 같은 분량이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한국처럼 서류를 뽑아 들고 담당자 자리에 가서 바로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들이 전문가이니 대충만 봐도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체크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겨울이 들은 말은 ”거기 두고 가, 이미 검토해야 할 문서들 다 보고 확인해 줄 테니까,“ 였다. 시스템이 있으면 시스템에 올려두면 순서대로 검토해서 답변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고, 별도의 시스템이 없으면 메일로 내용을 보내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하세월이었다. 그냥 잠깐 5분만 살짝 봐주면 바로 부족한 거 챙겨서 제대로 검토요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때로는 이미 모두 다 검토받은 내용이고 수정하라는 부분만 고쳐온 거라 10분만 같이 확인하면 끝나는 일인 것 같은데 싶어 답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온 주재원들과 할 때면 맘이 잘 맞았다. 스웨덴 사람들 너무 느려터졌다, 주인의식이 없다, 공무원처럼 일한다, 뭐만 요청하면 별거 아닌 것도 2주씩 기다리라고 한다는 등등 한국과 비교해 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경쟁사랑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현지 직원들이랑 싸우러 온 거 같아. 제일 발목 잡는 게 경쟁사가 아니라 현채인들이야.”
라는 주재원의 말에 겨울도 연신 맞장구를 쳤다.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다른 직원들에게 전수받은 팁을 얻어보기도 했고, 사정도 해보고 싸워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답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중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이자, 유럽 지역 본부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중요 프로젝트 아닌가. 그래서 법인장 찬스를 쓰기로 했다. 법인장이 말하니 담당자는 홈페이지에 들어갈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문구를 최우선으로 검토해 줬다. 그래도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검토한 내용을 받으러 담당자의 자리로 가자 담당자는 세모눈을 하고 겨울을 봤다. 그러면서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해주지만, 앞으로 다시는 일 이렇게 하지 마.”
겨울이 눈이 커졌다.
“이번에 네가 법인장을 통해서 한 행동은 내 업무를 무시한 거야. 나는 내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계획된 기한 내에 해낼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 손에 넘기게 만든 거라고.
그리고 절대 일을 요청한 다음에 재촉하지 마.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스웨덴에선 그건 그 사람만 업무 능력에 대한 모욕이야. 우리는 모두들 성인이고 자기 일은 누가 챙기지 않아도 할 수 있어. 언제 됐냐고 묻는 건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거라고.”
아무리 급하게 떨어지는 일이든 어떻게든 기한 내에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게 업무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겨울로써는 머리를 돌로 맞은 거 같은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