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현실 7
연말은 연말결산과 내년도 계획으로 바쁜 시기였다. 겨울의 캘린더에는 빽빽이 일정이 적혀있었다. 월요일 스웨덴 법인 내 팀장 회의, 화요일 유럽 지역 회의, 수요일 법인장과 업무보고 회의, 목요일 유관부서들과의 회의, 금요일 한국 본사와의 회의는 기본이었다. 거기에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여 각종 할 일들이 추가되었다. 법인장은 연말을 맞아, 스웨덴 법인 내에 모든 팀이 각자의 목표와 액션 플랜을 논의하는 워크숍을 갖길 원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틀에 걸쳐 발표 공유하는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그건 팀원이 5명인 팀이나 1명인 팀이나 똑같이 준비해야 했다. 발표시간이 10분이냐, 20분이냐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유럽 지역 본부는 유럽 지역 본부대로 내년을 위한 계획을 요구했다. 12월 초에 급하게 온 메일에는 3일 후까지 고객경험 개선을 위한 과제를 목표, 예산, 로드맵, 필요 자원, KPI까지 상세히 적어서 5개나 제출하라고 했다. 그 걸 왜 미용기기팀 팀장에게 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는 비공식적으로 맡은 기획 담당으로써의 변신이 필요했다. 법인장에게 말하자 CFO 역할을 하는 주재원과 논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의 코치하에 관련된 모든 팀의 팀장을 부른 뒤 회의를 하고, 의견을 받고, 과제를 정하고 각 과제의 담당자를 정해 자료 작성을 요청한 뒤 취합하여 정리하여 보내는 것까지 겨울이 담당해야 했다.
그 와중에 한국본사에서는 끝없이 매출계획을 변경했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법인장은 미용기기 사업의 5개년 매출 목표를 알려줬다. 거의 2배씩 성장해서 5년 후에는 올해보다 10배가 넘는 매출을 달성하는 꽤나 공격적인 목표였다. 내년의 목표는 올해의 2배. 그렇게 알고 있었다. 10월 초, 겨울이 일한 뒤 처음으로 내년도 매출계획을 제출하라는 메일이 왔다. 총 연간 매출 금액은 정해져 있지만, 월별, 분기별, 품목별 목표는 법인에서 채워 송부해야 했다. 겨울은 작년과 올해를 기준으로 월별로 매출 목표 금액을 나누었고, 내년도 운영전략에 따라 품목별 매출을 나눴다. 미용기기의 시장이나, 북유럽 시장에 대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좀 더 쉬웠겠지만, 당시 겨울은 일한 지 겨우 1달이 지난 상황이었다. 어렵게 익힌 시스템을 이용해 작년 매출을 월별, 품목별로 뽑아 분석을 하고, 다른 주재원들에게 물어가며 목표를 세웠다. 별거 아닌 숫자를 써넣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애들 재워놓고도 숫자를 보며 고민하고 고민해서 정한 숫자였는데, 몇 주 후가 지난 10월 말, 또 비슷한 메일이 왔다. 대신 매출 목표가 조금 바꿔있었다. 그 사이 매출 현황을 감안해서 또 월별, 분기별, 품목별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 간단하게 하려면, 지난번에 냈던 금액 기준으로 변경된 매출목표에 맞게 비율대로 조정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 목표금액이 소수점 아래로 지저분하게 남기도 했고, 그 사이에 업데이트된 매출현황을 감안해서 좀 더 의미 있는 목표를 정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겨울은 또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숫자를 만들어 법인장 보고 후에 송부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11월에도 12월에도 끝없이 변경된 매출 목표를 보내며, 월별, 분기별, 품목별 목표를 써서 보내라고 메일이 왔다. 어떤 때는 월별, 분기별, 품목별 목표까지 정해진 채로 와서 확인하라고 왔다. 이제까지 보낸 숫자가 있으니 그거 바탕으로 변경했겠거니 하고 들어가서 보면, 숫자가 제멋대로 바꿔있었다. 본부에서 전체 연간 목표금액과 월별 목표 금액을 바꾼 뒤, 법인별로 목표를 나눌 때 일괄적으로 비율로 계산한 탓이다. 한국에는 설과 추석에 소비가 늘어나는 것처럼 나라별로 많이 팔리는 시기가 다른데 그걸 고려하지 않고, 법인 규모별로 매출을 나눠놓은 것이다. 내년 설이 2월이라고 북유럽에서는 아무런 이슈가 없는 2월 목표가 1월의 2배로 잡아놓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겨울은 메일을 보낸 담당자를 찾아 상황을 설명하고, 어디까지 변경할 수 있는지 확인해 다시 숫자를 넣어야 했다.
한국 본사의 또 다른 부서들도 질세라 열심히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결재 업체 내부화, 배송 실시간 확인을 위한 시스템 구축등의 전사적으로 잡은 목표들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지 계획안을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사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목표들이었지만, 아직 매출이 작은 스웨덴 법인에게는 의미 없는 계획이었다. 배송 실시간 확인 시스템의 경우, 한 달에 고작 백 건도 안 되는 배송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최소 3십만 유로 이상의 예산과 전담 인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예산을 써서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해도 초기에는 이슈가 많을 터였다. 지금처럼 배송이 적을 때는 운송담당자에게 전화해서 현재 위치를 물어보는 게 더 빠르고 비용도 안 들었다. 하지만, 매출 규모가 큰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 법인에서 필요한 업무를 내년도 목표로 잡았고, 그렇게 정해진 목표는 그와 상관없는 중소 법인들까지 내려와 현황파악 및 실행안 제출을 요구해 왔다. 팀원이라고는 반쪽짜리 한 명이 전부인데 말이다. 그렇게 메일이 오면, 겨울은 1번부터 번호를 붙인 열몇 개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그 내용을 아는 담당자를 찾아다니고 자료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법인에서 요청한 자료, 유럽지역본부에서 요청한 자료, 한국 본부에서 요청한 자료에 법인 회의, 유럽과의 회의, 한국 본사와의 회의에 법인 워크숍까지 겨울이 야근을 하지 않으면 펑크가 날 수밖에 없는 업무량이었다. 유럽법인이나 본사에서 일괄로 내려온 것 중에, 이런 것까지 해야하나 싶은 건 법인장에게 말해서 조정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설명을 들을 때는 알겠다며 얘기해보겠다던 법인장도 전화를 하고 나면 그냥 너무 시간 쓰지 말고 해서 제출하라고 말을 바꿨다. 처음에야 제품도, 회사도, 시스템도 익숙지 않으니 야근하고 주말에 집에서 일하더라도 시간을 투자해 빨리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업무 파악도 되었고, 회사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근무시간에는 여기저기 미팅을 쫓아다니고, 그 외 시간에 자료를 작성하며 저녁시간과 주말을 보내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에도 본사랑 유럽지역본부에서 온 자료 만드느라 집에서 일했다고 하니까 뒤쪽에 있는 다른 팀 현지 채용 한국직원이 얘기했다. 그녀도 한국에서 대기업 다니다가 맞벌이하며 회사 다니기 힘들어 스웨덴으로 이민을 온 직원이었다.
”쉬엄쉬엄해요, 주재원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일해요? 주재원들이야 그렇게 일하라고 집 주고, 차주고, 국제 학교 보내주는 거지만, 우린 현채잖아.”
처음에는 열심히 하는 스스로가 책임감 있고 프로페셔널하다는 생각이 들어 꽤나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가끔이지,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워라밸을 찾고자 온 스웨덴 아니었나? 애들 태어난 뒤에는 한국에서도 이렇게까지 일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직원들이 이렇게 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스웨덴 직원들은 바쁠 때는 좀 더 늦게까지 일했지만, 겨울처럼 밤낮없이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연말이 되면 아이들은 또 방학이 된다. 12월 중순부터 1월 6일까지 3주간. 할 일이 잔뜩 쌓여 있는 탓에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 때도 휴가를 내기가 힘들어 보였다. 이번에도 엄마 없이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겨울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스만 하다가 잔뜩 엉킨 할 일들과 책임들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문화적 차이를 온몸으로 막아내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빼내게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