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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는 못 합니다.

이민자의 현실 8

by 노랑연두

수요일, 마케팅팀, 고객서비스팀, 배송팀의 담당자와 디맨드 플래너까지 함께하는 미용기기 업무보고 회의날이다. 1주일 동안의 업데이트된 매출을 보고하고 현재까지의 진행사항과 앞으로 계획을 보고하는 시간이다. 블랙프라이데이만큼이나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와 다음날인 박싱데이 관련하여 유통업체로 납품 건이며, 온라인 마케팅 진행상황을 공유했다. 별다른 이슈는 없어서 큰 소리 없이 회의가 끝나고 모두 나가는 길이었다. 겨울은 다른 직원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법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바쁘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보고를 받던 탁자에서 본인의 책상으로 돌아가 보고 내용이 프린트된 A4용지와 늘 한 몸처럼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있던 법인장은 고개를 들어 겨울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에요? 길게 걸려요?”

“한 10분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법인장은 왼쪽에 붙은 이번 주 일정표를 쳐다봤다. 시간대별로 회의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겨울을 한번 더 보더니, 내선 전화를 들어 다이얼을 눌렀다.

”재무팀에 얘기해서 10분만 있다가 올라오라고 얘기해 줘요. “

수화기를 내려놓고 내려놓았던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쪽 편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겨울도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둘러앉아 보고를 했던 테이블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제 들어온 지도 3개월이 넘어서 업무 관해서 좀 느낀 게 있어서 논의드리려고 합니다.”

“네, 해보세요.”

“원래 화장품만 하다가 미용기기 사업을 맡아서 처음에 좀 낯설기도 하고 회사 시스템도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을 좀 했는데요. 알면 알수록 미용기기 사업이 성장 가능성이 많은 분야라고 생각되고 키워가는 재미가 있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년 두 배씩 성장이라는 목표가 챌린징하긴 하지만, 3개월 동안 지켜본 결과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 과정이 좀 쉽지가 않았잖아요. 전임자가 퇴사를 해서 업무인수인계도 하나도 못 받고, 미용기기도 잘 모르고, 회사 시스템이 복잡해서 익혀야 할 것도 많았고 미용기기 사업 자체도 법인에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체계가 거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엄청 고생했어도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은 한 90% 수준으로 업무를 따라잡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보기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일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 야근하고 주말에도 컴퓨터 켜서 일했거든요.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저 3개월 동안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새벽까지 일했고, 주말에 컴퓨터 안 켠 날이 없었어요. 히스토리 파악하려고 자료 읽고, 시스템 익히려고 들어가서 이것저것 눌러가며 어떻게 하는지 배워서 돌아가는 거 확인할 수 있게 하려고요. 정말 동틀 때까지 일한 적도 많아요.”

“아, 몰랐어요. “

“전 아직 회사랑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리해서 집에서도 일한 거고요. 근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도 할 일이 많아서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해낼 수가 없네요. 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겨울은 최근에 유럽지역본부와 본사, 그리고 법인에서 요청한 일들과 기본으로 해야 하는 미팅들과 이슈별로 추가되는 미팅들을 나열했다. 여기에 일상적으로 해결하는 이슈와 주간 정기 보고자료 작성까지 더해서 업무시간 내에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양임을 강조했다. 팀원이라고 한 명 있는 직원조차 미용기기 전담이 아니니, 미용기기 팀으로 떨어지는 일들을 나눠주기가 애매했던 것도 겨울에게 일이 쌓이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2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계속 일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하나는 팀원을 미용기기 전담으로 빼줄 것. 또 하나는 연봉 인상이었다.

“전 솔직히 주재원까지는 아니지만, ‘준주재원‘급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법인장님도 그런 걸 저한테 기대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렇지.”

법인장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비해서 비교 안 되게 적어서요. 적어도 **정도는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연봉 제안을 할 때, 겨울은 좀 어리바리하게 굴었었다. 계속된 취업 실패로 자신감이 많이 줄기도 했고, 이 나라의 임금 수준도 잘 몰랐고, 어느 정도의 업무강도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일은 잘하면 일이 늘어난다고 했던가. 맡은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일이 늘어나서 겨울은 현지채용인력이지만 한국에서 온 주재원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쥐여 짜져서 가기 싫다던 주재원처럼 말이다. 집 주고 차주고 그 비싸다는 국제학교 보내주니 가족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하자는 생각으로 해외 나가는 주재원들. 그런데 겨울은 혜택도 하나 없이 월급은 그들의 절반도 못 미쳤다. 심지어, 현지채용된 직원보다도 적다는 걸 알게 되곤 배신감이 몰려왔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현지채용된 팀장들이랑 얘기하다가 우연히 듣게 되니, 겨울은 그들보다 앞자리 숫자가 하나 적었다.


끝까지 이야기를 듣더니, 법인장은 그렇게 일이 많은지 몰랐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겨울은 늦은 시간에 또는 주말에도 그를 참조로 넣어 많은 메일을 보냈었다. 그가 몰랐을 수가 없었다. 아마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알게 되면 업무를 조정해 줘야지만, 모르면 속이야 어쨌든 업무는 잘 돌아갈 테니까.


겨울이 일하는 건 마음에 든다고 말하며 법인장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렇게 힘들면, 팀원으로 내려오는 건 어때요?”

“그럼 팀장은요?”

“새로 뽑아야지.”

그녀가 일이 너무 많아서 팀원을 늘려달라고 했더니, 그는 팀원이 되고 팀장을 새로 뽑겠다 말하는 건 무슨 심보일까?

“겨울씨가 일하는 건 마음에 드는데, 리더로서의 능력은 조금 의문이긴 했었어. 지금 하는 일이 버겁다고 하니 팀원으로 일하면 더 낫지 않겠나 해서.”

0.5명짜리 팀원이 있는 팀의 팀장에게 리더로서 어떤 능력을 보이길 바랐던 걸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는 아닌 것 같습니다. 팀장이니까 그 책임감으로 지금까지 무리해 가면서 일했지, 팀원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안 했죠. 그리고 이미 십 년 넘게 일해 왔는데, 다시 팀원으로 내려가는 건 커리어적으로 아니고요. ”


애써 상처받지 않은 척을 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인력보충과 월급인상이 안 되면 그만두겠노라 다시 한번 못을 박고 법인장 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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