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현실 9
금요일 11시. 소형가전을 담당하는 주재원과 겨울이 보고를 시작했다. 몇 가지 지적사항이 있었지만, 비교적 무난히 끝났다.
“겨울씨, 오늘 오후에 바쁜 일 있나요?”
“1시부터 본사와 미팅 있는데 이번 주에는 취소되어서 별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그러면 오후에 잠깐 봅시다.”
“언제쯤일까요?”
“4시 정도인데, 앞에 일정 끝나는 데로 내가 부를 테니까 미리 와있을 필요는 없어요.”
같이 일하는 디맨드플래너가 언제부터 100%로 일 할 수 있는지 날짜가 나온 것일까? 3월에 연봉 조정을 얼마나 할지 얘기하려나. 수습기간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확정된 걸 얘기할 시간이 되기 했다. 원하는 걸 들어주기 힘들 거 같은데, 이 정도 조건에서 계속할래 말래라고 물어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겨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직원에게 메신저로 이 소식을 전했다. 겨울에게 주재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고 말했던 그 직원이었다. 겨울이 다른 현지 채용 팀장 월급보다 적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여기가 얼마나 치사하게 구는지를 알려준 것도 그 직원이었다. 다른 한국기업의 법인에 있다 온 그는 가끔씨 겨울과 얘기할 때면 한국기업 법인이라고 다 여기 같지는 않다며, 조만간에 담판을 지겠노라 얘기하곤 했다. 예상과 다르게, 담판은 겨울이 대신 지으러 갔고, 그는 다른데 이직을 앞두고 있지만.
“인력충원 이렇게 차일피일 미뤄지고 연봉도 5% 정도나 올려주면서 좀만 참아보라고 하면 뭐라고 할 거예요?“
“그러게요..”
“아마 그냥 그거에 남으면 더 쥐어짜려고 할걸요? 그거 조금이라도 자기가 챙겨줬다고..마음 단단히 먹어요”
겨울은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모니터를 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법인장이 드디어 얘기하려나 봐, 좀 있다 4시에 좀 보자네.’
선우는 겨울이 일하는 것에 늘 협조적이었다. 법인장에게 잘 보이라고, 아침형 인간도 아닌 겨울에게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찍 출근하라고 등 떠밀고는 아침 시간 아이들 등원을 도맡았다. 주말에 할 일이 많아 보이면, 애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갔다. 자기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겨울에게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겨울이 법인장과 현지직원들 사이에 껴서 욕먹고 속 터져할 때도, 본사, 유럽지역본부, 법인 사이에 교통정리되지 않은 일 때문에 고민할 때도 ‘너무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 ‘고 얘기하곤 했다. 겨울이 처음 들어갔을 때, 전임자가 바로 그만둬서 맨땅에 헤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힘들면 그만둬도 돼, 좀 아껴서 살면 되지.”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란 판에 자꾸 저런 말을 입에 올리지 싶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소중한 내 일인데 왜 본인이 나서서 그만두니마니 하는 말을 하는 걸까 싶어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그만두는 건 스스로의 결정이지 선우가 허락해주고 말고 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 말도 계속 들으니 남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였다면 꾹 참고 어떻게든 버텼을 텐데, 법인장에게 더 이상 이렇게 못 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니.
금요일에는 재택근무하는 사람이 많아서 사무실이 썰렁한 편이지만, 출근한 사람들도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4시쯤 되면 더 한가해진다.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법인장이 겨울을 불렀다.
법인장실 안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인도계인 인사과장이 서류를 들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입사한 지 5개월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어땠나요?”
법인장이 영어로 겨울에게 말했다. 일이 너무 많고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힘들다고 면담을 신청한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얘기했던 어떤 일도 진행된 게 없었다. 팀원이니 인턴이나, 월급 인상이니..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일 자체는 보람 있고 재밌지만…”
매끄럽지 않은 인수인계, 다양한 부서에서 오는 요청을 부족한 인력을 데리고 하기엔 일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되풀이했다. 인사과장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팀이 더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지난번에는 인사과가 없었으니, 함께 들으려고 또 묻는 건가? 겨울은 의아해하며 지난 면담 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다이어리에 적으며 듣던 법인장이 고개를 들고 겨울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지난 5개월 동안 겨울씨가 노력해 준 덕분에 매출이 많이 성장했고, 팀이 체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
겨울은 입꼬리를 힘겹게 올리며 웃으며 감사하다고 답했다.
“얼마 전 회사생활이 힘들다고 말하며, 몇 가지 요구사항을 이야기했었죠? 그중에 인력문제는 팀원의 업무 조정이나 인턴채용은 현재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연봉인상은 3월에 얘기해 보기로 했고요.”
‘업데이트된 게 하나도 없네,’
애써 올렸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런데, 겨울씨의 이야기를 듣고 내부적으로 고민해 본 결과, 이 회사와 함께 하는 겨울씨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따라서 겨울씨와의 계약을 끝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종이를 읽고 아래에 서명하면 됩니다.”
법인장은 여전히 영어로 말했다.
행복? 들어본 중 제일 거지 같은 해고 이유였다. 업무를 가지고 뭐라고 하기엔 건수가 없었던 걸까? 인사과장에게 눈짓을 하자 인사과장은 근로 종료 계약서 2부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겨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습기간이니 6개월 안에는 언제든 자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겨울도 언제든 그만둘 수가 있었기에 겨울을 잡고 싶다면 노력을 할 거라 생각한 것이라 지른 것이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주고 밤낮없이 일하지 않았던가. 분명 겨울이 오고 나서 팀의 체계가 잡혔고 매출도 목표를 상회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인력보충과 월급인상을 요구하며 면담을 할 때 어쩌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상은 했지만, 분명 몇 번이나 불러서 노력을 해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러면, 제가 하던 업무는 어떻게 되나요?”
자른다는 말을 듣는데, 고작 묻는 게 업무 얘기인가. 그런데도 겨울은 그게 궁금했다.
“사람을 새로 뽑았고 3월 말에 올 예정이에요. 그전까지는 재무팀 한팀장이 잠시 대리할 테니 업무 인수 인계하면 됩니다.”
3월 말에 온다고? 그 이야기는 지원자가 면접도 다 보고 뽑혀서 이미 최종 오퍼까지 수락했다는 뜻이었다. 겨울에게 연말과 신년을 맞이해서 열심히 자료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하던 때, 왜 아무 얘기가 없나 기다리고 있을 때, 도대체 팀원의 업무 조정은 언제 되나 기다리고 있을 때, 법인장은 뒤로 그녀를 대체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대체자가 최종 오퍼를 수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계약서를 만들어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그전에 단 한 번의 언질도 없이, 계약서에 업무 종료 날짜를 수습 기간이 끝나는 날짜에 맞춰 적어서 말이다.
’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는 거지?’
먼저 사인을 마친 뒤 법인장은 사인이 된 종료계약서를 겨울 앞으로 밀며 본인이 쓰던 펜을 겨울에게 건넸다. 인사과장과 법인장이 겨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겨울은 그 펜을 받아 사인을 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인을 마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인장은 방을 나가려는 겨울에게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평범한 어조로 ‘수고했어요. 업무 공백 없게 인수인계 잘해요.’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한국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