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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처럼 일하지 않는데도..

멈춤 다시 원점 2

by 노랑연두

요즘 하린이가 요즘 부쩍 친하게 지내는 그레이스 엄마, 샬롯이 이야기를 했다. 스웨덴에서 있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배려가 잘 되어 있는 만큼, 아이를 낳는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소 세율이 35%부터 시작하는 탓에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싱가포르 출신 샬롯은 달랐다. 10년 전, 싱가포르에 파견을 나온 스웨덴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샬롯은 그레이스의 오빠를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물가가 비싼 싱가포르였지만 금융권을 다니는 남편과 넉넉한 친정 덕분에, 샬롯은 스웨덴에 오기 전까지 큰 불편 없이 지낸듯했다. 그랬기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즐길거리가 적은 스웨덴이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하린이네는 이번 부활절 휴가 때 어디 가요?”

“저희는 아직 특별한 계획이 없네요.”

“우리는 이번에 태국으로 갈려고 표 예약해 놨어요. 간 김에 겸사겸사 싱가포르도 들리고…

여름 때는 무슨 계획 있어요? 우린 여름에는 일본에 한 3주 정도 머물다가, 돌아와서 좀 쉬고 그다음에는 스페인에 갈 예정이에요. 시부모님이 스페인 남부에 별장이 있으신데 거기도 좀 머물려고요. 봐서 괜찮으면 우리도 별장 하나 살까 고민하고 있어요. 스웨덴은 겨울이 너무 별로잖아.. 그리고 가을방학 때는 이탈리아 체르비니아 가려고요.”

“체르비니아요?”

“아, 알프스 마터호른 있는데인데 거기는 10월부터 스키 탈 수 있거든요. 추운 건 좀 싫긴 한데, 애들 아빠가 워낙 스키를 좋아해서… 하린이네는 여름이랑 가을방학 때 계획 있어요?”

“아니요, 이제 세워봐야죠.”

“우린 겨울방학까지 일정 다 잡아놨어요. 크리스마스 방학 때는 타임스퀘어 카운트다운 보려고 뉴욕 가서 연말까지 있다가 오려고요. 솔직히 스웨덴은 좀 지루하잖아요.”

샬롯이 묻지도 않은 여행 계획을 줄줄 읊었다.


‘저렇게 여행을 다니려면 도대체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두세 달 간격으로 근처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넘나드는 여행 계획을 들으며 겨울은 생각했다.

‘하긴 돈만 문제는 아니지.’

겨울은 자신에게 돈이 충분하다고 해도 저렇게 긴 여행을 자주 계획하진 못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럽이 휴가가 길다 해도 아이들 방학 때마다 계속 쉬기는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샬롯의 남편은 여행지에 따라가서 재택근무를 하는 일이 잦았고, 가끔은 같이 출발했다가 먼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샬롯은 남편 회사가 자기 없으면 안 돌아가냐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느냐며 툴툴거리곤 했다.


겨울은 여행에서 먼저 돌아간 남편을 못마땅해하는 아내가 아니라 ‘회사핑계를 대며 가족끼리 시간을 망치는 남편’에 자꾸 감정이입이 되었다. 겨울도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급한 일이 아니라면, 늘 회사 스케줄이 개인의 스케줄보다 먼저였지 않았나. 휴가도 신제품 출시 일정을 감안해서 짰고, 일정이 확정되지 않으면 선뜻 비행기도 예약하지 못했다. 겨울이 샬롯의 남편처럼 외벌이였다면 회사가 걱정되어 아예 휴가계획을 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새삼스레 외벌이로 일하며 생계에 대한 짐을 홀로 지는 샬롯의 남편이 안돼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다면 지금 선우의 상황이 샬롯의 남편과 다르지 않을 건 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일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선우도 결국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혼자 져야 할 텐데.


당분간은 회사에서 받은 월급 모아놓은 걸 쓰면서 지내겠지만, 길어지면 결국 선우에게 손을 벌려야 할 것이다. 내가 버는 돈이 아니라, 배우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니.. 스무 살 이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 그레이스 엄마는 엄마처럼 일하지 않는데도 돈이 많데.”

하린이의 말이 겨울의 가슴을 찔렀다. 하린이에게 자신에 대한 수식어가 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자신과는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샬롯을 하나로 묶어 생각한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딱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샬롯과 다른 게 무엇이겠는가? 짧지만 스웨덴에서 회사를 다녔다는 것? 그만 둔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 새로이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옛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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