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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지? 왜 이렇게 시간이 많지?

멈춤, 다시 원점 1

by 노랑연두

4월, 서머타임이 시작되자, 또다시 한없이 눈부신 스톡홀름의 하루가 밝았다. 침대 옆 커튼을 여니 햇살이 쏟아진다. 학교, 회사 어떤 것도 없는 일상이 낯설다. 아이들을 챙겨 버스를 탄다. 아직 공기는 차지만 여기저기에 노란색과 보라색 꽃들이 눈에 띈다. 부활절 수선화와 큰봄별. 이름에서도 봄이 느껴진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눈을 헤치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갔던 출근길이 꿈속에 일어난 일처럼 아득하다. 조금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업무처리할 시간을 확보하려고 동도 트기 전 버스에 앉아 휴대폰으로 크라우드 피씨에 접속해 시스템을 돌려놓았는데, 이제 겨울을 업무를 방해하는 어떤 요청 메일도 미팅도 없다. 맞다, 더 이상 그렇게 해야 할 일도 없지. 겨울이 약속을 잡거나 할 일을 정하지 않으면 애들을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올 때까지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자유시간이다.


왜지? 왜 이렇게 시간이 많지?

나 뭘 해야 하지?


먹다가 흘리면 배에 떨어지던 만삭까지 회사를 나갔고, 아이들 아파서 집에 있을 때도 회사를 나갔는데, 모두 아프지 않은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겨울은 처마 아래에서 서서 바깥풍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해가 파란 하늘, 연둣빛 새잎이 돋아난 가로수와 인조잔디라도 깐 것처럼 푸르른 풀밭을 한가득 비추고 있었다. 겨울만 빼놓고.


종료계약서와 펜을 건네받은 날, 겨울은 그 길로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하늘이 어슴프레 저물어가고 있었다. 늘 종종걸음으로 다니던 길이 어두워지기 직전 푸르스름함으로 가득했다.


”나 방금 잘렸어. 새로 사람 뽑았나 보더라. 2월까지만 나오래. “


겨울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빰으로 흘러내렸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어나가는 설명을 듣는 내내 선우는 별다른 말 없이 ‘응‘을 반복하고 있었다. 겨울의 말이 끝나자 선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차분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잘 되었어. 어차피 계속 다니면 점점 더 힘들기만 했을 거야.”

하린이가 넘어져 울 때 달래주던 말투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집으로 와요. 이제 애들 픽업하러 왔어, 나도 애들 찾아서 집으로 갈게.”


지하철을 의미하는 tunnelbana의 첫 알파벳인 T자 표시가 가까워졌다. 겨울은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저 아래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평소 같으면 달려 내려가 지하철을 탔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승강장에 겨울을 내려놓자 터덜터덜 발걸음 옮겼다. 지하철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닫히자, 바로 몸을 돌려 승강장의 벤치에 앉았다.


그저 워라밸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주어진 일을 잘하면서도 아이들이 아프면 회사 눈치 보지 않고 돌보러 갈 수 있고, 때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생활.


고객서비스 팀장인 한나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야근을 하고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해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기한을 조정해야 하는 거야. 네가 무리해서만 할 수 있다는 건, 할 수 없다는 거니까. “


많은 동료들이 자주 일찍 퇴근하고 휴가를 쓰면서도, 새로운 일을 시키면 일이 너무 많아서 그걸 하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들은 놀러 간다고 쉬고, 아프다고 집에서 일했다. 가을 방학에 일 때문에 휴가를 못 내면,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왔다. 여기에선 크리스마스에 길게 휴가 가는 동료들을 감안해 일정을 짰고, 업무량을 계산해서 해내지 못할 일은 내년으로 미루라고 이야기했다. 한국에서는 아파도 출근했고, 아이들이 방학이던 아프던 휴가를 가던 그건 업무진행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 건 일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법인장이 겨울이 업무 하는 게 마음에 든다고 얘기한 건 그녀가 불평 없이 시키는 걸 빨리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야근을 하든 주말에 근무를 하든 기한 내에 일을 해내는 게 한국 스타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이렇게 사람을 자르진 않았다.


자꾸 그날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내려주고 향한 마트에서 방울토마토와 양상추, 돼지목살과 두부를 골라 장바구니에 담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육아와 커리어의 공존, 워라벨, 그런 걸 원해서 왔던 스웨덴 아니었던가. 뭘 또 그렇게 증명하고 싶어서 아등바등 일을 했던가. 잘하고 싶은 스스로의 욕심에 잘하라는 압박이 더해져 다른 직원들과의 친해지기도 전에 공격적으로 굴었던 것도 후회가 되었다. 너무 성급했었다.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무리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이었기에 금세 지쳤다.


한나 말이 맞았다. 무리해서만 할 수 있다는 건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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