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표.. 더는 못 해? 200프로는 해야하는데..

이민자의 현실 9

by 노랑연두

그다음 주에 겨울은 법인장실로 두어 번 불려 갔다. CFO 역할을 담당하는 주재원과 함께였다. 인력보충이 쉽지 않지만, 원래부터 50%만 일하는 직원을 100%로 올릴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나머지 50%를 다른 직원이 받아야 하는데 그게 지금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그 대신 그전까지 쓸 수 있도록 무급 인턴을 뽑는 방법이 있으니 인턴에게 시키고 싶은 일을 정리해서 공고를 내보자고 했다. 그리고, 3월에 연봉 협상 시즌에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말했다. 겨울이 말한 만큼까지는 힘들지만. 그리고 내년부터는 미용기기팀을 영업팀으로 변경시킬 거라면서-물론 겨울의 의사는 하나도 묻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월급의 일부가 실적 달성에 따라 연동되니, 초과달성시에는 보너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얘기는 거꾸로 말하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월급이 깎인다는 말인데도 마치 돈을 올려주는 것처럼 포장하는 법인장을 보며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몰아치듯 몇 번을 불러 성에 차지 않은 안들을 가지고 와서 겨울에게 얘기하더니 그 뒤에는 한참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렇게 뭉개다가 말건가 싶어서 겨울도 의욕이 떨어졌다. 더 이상 주말에 집에서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더이상 못 하겠다고, 새벽까지, 주말에도 일해도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했을 때 법인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할 수 있는 데로 최선을 다하지만, 그 이상이면 펑크도 내도 그래,”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나중에 생길지 모를 노동법적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한 입바른 말인지 모르겠지만, 겨울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전히 업무시간 내에는 점심도 못 먹어가며 일을 했지만, 집으로 가서는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더 이상, 그렇게 일해야 할 필요성도 명분도 없었다. 나의 인사권자가 일이 많으면 펑크를 내라고 하지 않는가.


해가 바뀌어 1월도 일주일이나 지나갔다. 겨울이 법인장의 호출로 법인장실로 들어가자, 법인장은 CEO라고 적인 명패가 올려진 책상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단추를 목까지 올려 잠근 얇은 체크무늬 남방 와 진회색 면바지 사이에는 얇은 가죽 허리띠가 남방의 단추만큼이나 꽉 묶여있었다.

“겨울씨, 1월은 목표에 몇 프로나 달성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확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대충 어느 정도 될 거 같은지 간단히 숫자만 말해주세요.”

그는 짜증을 참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아직 월초라 좀 봐야 될 거 같긴 한데.. “

그녀는 주저한다.

“아니.. 정확할 필요가 없다니까.. 담당자가 대충 이번 달 얼마할 거 같은지 감이 있을까 아니야. 숫자를 말해봐 봐.”

그는 다그치듯 외쳤다.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저하던 그녀가 겨우 의견을 말했다.

“아.. 더는 못 해? ”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소리쳐 물었다.

“200프로는 해야 하는데.. “

겨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중얼거린다.

”목표보다 많이 할 거 같은데 그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매출 추이를 좀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

겨울은 변명이라도 하듯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200프로는 해야 하는데.. 연초에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본부에서도 눈여겨보고 우리 쪽에 예산이라도 더 심어주고 그러는 거지.. 응? “

그는 그녀를 타이르 듯 말을 이었다.

”네 좀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

겨울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200프로 할 수 있게 좀 방법을 생각해 봐요.. 그럼 이제 가도 돼요. “


겨울은 법인장 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가까운 커피 머신으로 가 카페라테 버튼을 누른다. 벌써 커피가 두 잔 째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커피를 더 많이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겨울은 머그컵을 손에 든 채 자리로 향했다.


그 사건 이후 두어 번 부른 다음부터, 법인장은 그런 이야기를 언제 들었냐 싶게 굴었다. 오늘처럼 겨울을 부른 적이 적지 않았지만, ‘인력보충’이나 ‘연봉’에 대한 별다른 말은 없었다. 대신 겨울의 다른 업무인 기획과 관련해서 보고를 계속 요청했다. 지지난 주 금요일에는 의료기기 담당과 함께 의료기기 품목의 월별 매출방안과 주별 매출 목표, 주별 실행계획을 짜서 보고하라고 했고, 지난주 금요일에는 스마트 홈 담당자와 함께 스마트 홈 사업 부분의 월별 매출방안과 주별 매출목표, 주별 실행계획을 짜서 보고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내일 모레인, 이번 주 금요일에는 소형 가전 담당자와 소형 가전 품목의 월별 매출방안과 주별 매출목표, 주별 실행계획을 짜서 보고해야 한다.


금요일은 많은 직원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스웨덴에서는 재택근무 가능일수를 일주일에 2,3일 정도 주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긴 한국회사라 그런지 일주일에 딱 한 번이었고 그나마도 법인장은 못마땅해했다.

“재택근무 일주일에 한 번 가능한데, 상사한테 미리 얘기해서 써야 하는 거라 팀원이 출근하는 게 낫겠다 싶으면 승인 안 해줘도 돼요. 참고로 나는 출근을 더 선호해요.”

입사 직전 법인장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겨울은 12월까지 단 한 번도 재택근무를 하지 않았다. 굳이 법인장이 대놓고 재택근무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심기 거스를 필요도 없고, 겨울도 빠른 업무 파악을 위해서는 회사로 출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퇴근 후에도, 주말에서도 집에서 일하고 있지 않는가? 굳이 다른 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간까지 집에서 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법인장에게 더 이상 이렇게는 힘들다고 말한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겨울의 업무여건을 개선해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더 이상 정해진 근무시간 이상으로 일할 필요 없겠다 싶었다. 재택근무도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어서 금요일에는 재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았는지 그는 귀신같이, 새로운 보고할 거리를 만들어 금요일에 보고를 시키고 있었다.


소형 가전을 담당하는 주재원은 한국에서 파견 온 지 고작 두 달째였다. 겨울이 입사한 지 3개월 뒤였다. 기존 담당자가 한국으로 복귀하기 전, 그가 한 달 동안 업무인수인게를 받고 혼자 일하게 된 지는 고작 한 달째였다. 그런 사람과 이제 막 5개월 차에 접어드는 겨울이 같이 올해 계획을 월별도 아닌 주별로 짜고 있는 셈이다. 북유럽 시장을 1년도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 두 명이 매주매주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알고 매주 계획을 짠단 말인가. 심지어 유럽 지역 본부나, 한국본부에서는 주별 계획을 요구하지도 않는 데 말이다. 하지만 겨울은 까라면 까는 한국식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어리바리하고 있는 주재원을 도와가며 보고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5화이렇게는 못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