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다시 원점 5
5월, 서머타임이 시작하면서 급하게 길어지기 시작한 해는, 이제 암막 커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7시, 알람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분주한 아침이 시작했다. 눈에 졸음이 가득한 아이들을 깨워 식탁에 앉힌다. 어젯밤 읽다만 책들과 공부하고 치워놓지 않은 문제집, 낙서 같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식탁을 대충 치우고 시리얼과 우유, 숟가락이 꽂힌 그릇을 앞에 놓아준다.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는 손짓에도 졸음이 가득하다. 첫술 뜨는 것만 확인하고 겨울은 바로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연다. 반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들은 방울토마토와 포도를 꺼내 하린이와 하준의 과일통에 각각 넣는다. 그러고는 식기 세척기를 열에 안에 들어있는 물통에 꺼내 물을 넣고는 과일통과 함께 가방에 넣어준다. 알람이 다시 울린다. 7시 25분이다.
“밥 다 먹었어? 이제 5분 있으면 양치하고 옷 입어야 돼.”
겨울은 알람을 끄며 아이들에게 소리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안을 시작한다. 어제 잠자기 전에 발라놓은 기미 연고가 조금이라도 남았을까 싶어 볼을 중심으로 클렌징 폼을 발랐다. 삼십 대가 넘어가면서 얼굴에 생긴 얼룩은 점점 커지고 진해지기 시작했다. 스웨덴으로 오기 전, 더 이상 메이크업 베이스로 커버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되자, 겨울은 점심시간을 쪼개 피부과에 갔었다.
“이걸 기미라고 해야 하나, 흑자라고 해야 하나.”
의사 선생님은 클렌징 티슈로 닦아낸 겨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설시즌이 끝나고 나면 나이대가 있는 브랜드들에서는 ‘화이트닝’ 콘셉트로 광고물을 만들고, 세트를 기획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십 년 가까이 ‘기미’라는 단어를 매년 봄마다 봤지만, 자신의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눈에 띄기 시작했던 얼룩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겨울의 노화를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스웨덴에 오기 직전, 레이저 치료를 두어 번 받았지만, 살짝 옅어졌을 뿐 없어지진 않았다. 봄이 온 뒤로 해를 많이 쬐서인지 양쪽 빰에 있는 얼룩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또다시 알람이 울린다. 7시 30분이다.
“밥 다 먹었지, 이제 양치하고 옷 입어.”
아이들에게 소리치고는 우윳빛 토너를 얼굴에 바른 뒤, 흡수되기도 전에 선크림을 짜서 양 뼘에 있는 얼룩 위에 덜어 놓고는 양쪽 손가락으로 펴 바른다.
“엄마, 도와주세요.”
양치를 마친 아이들이 마지막 점검을 해달라며 겨울을 부르기 시작한다. 4개월에 한 번씩 가는 정기 치과 검진에서 간호사가 10살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가 양치를 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매번 양치를 할 때마다 겨울을 부른다. 하준이가 놓쳤을 것 같은 어금니 뒤쪽과 이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닦아주는데, 하린이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투정 부리기 시작했다. 오빠를 먼저 해주는 게 화가 났나 보다.
“오빠 해주고 금방 해줄게, 구석구석 닦고 있어.”
짜증 내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리지만,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려 노력한다. 하린이 양치를 도와주고 있는데, 먼저 양치를 마친 하준이가 겨울을 부른다.
“엄마, 오늘은 몇 도예요?”
“잠깐만,”
겨울은 하린이 양치를 급하게 마치고는 휴대폰을 들어 날씨를 확인한다. 현재 온도 8도 최고 온도 16도에 해가 그려져 있다. 이번 주 내내 최고 기온이 10도 근처였는데, 오랜만에 15도를 넘는 숫자를 보니 반갑다.
“오늘은 좀 따뜻하데. 긴팔, 긴바지 입는데, 너무 두꺼운 건 입지 마.”
하린이와 함께 화장실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준비가 끝난 하준이는 까만 맨투맨 티셔츠에 까만 츄리링 바지를 입고는 생활방수가 되는 남색 잠바를 꺼내고 있다. 겨울도 서둘러 옷을 입고 하린이를 쳐다보니, 아직도 서랍장 안만 들여다보고 있다.
“박하린! 옷 안 입고 뭐 하고 있어! “, 겨울의 언성이 높아진다.
”지금 뭐 입을지 고르는 중이란 말이야.”
“그냥 아무거나 입어, 오빠는 지금 다 입고 기다리고 있잖아!”
끝도 없이 느리 빼는 하린이 때문에 겨울은 결국 참았던 화를 폭발하고 만다.
“뭐 입을지 모른단 말이야.”
하린이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그럴 시간 없어, 늦었어!! 그냥 이거랑 이거 입어!”
하린이는 마지못해 옷을 받아 든다. 겨울은 계속 미적거리는 하린이의 손에서 거칠게 윗도리를 뺏어서 옷의 가운데 구멍에 하린이 얼굴을 통과시킨다. 하린이가 팔을 끼는 동안, 겨울은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들어 바지 아래쪽에서 안으로 손을 넣는다. 엉덩이 쪽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있는 하린이 발을 잡아 바지를 넣어버린다. 반대편도 똑같이 넣어주자 하린이는 일어서서 바지를 올린다. 그 사이에 양말을 꺼내 한번에 신길 수 있게 손을 넣어 접힌 아코디언처럼 만들어놓는다. 7시 45분, 또 알람이 울린다.
“이제 가야 돼, 빨리 양말 신고, 잠바 입어.”
양쪽 발끝에 양말까지 넣어주고 현관으로 가니, 하준이의 입이 잔뜩 나와있다. 서둘러 나온 하린이의 머리는 잔뜩 엉켜 있다. 버스를 타서는 급하게 빗을 꺼내 머리를 빗겨준다.
겨우 시간에 맞춰 애들을 학교에 들여보내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 버스에 올라타 앉아, 겨울은 생각에 잠긴다. 왜 항상 이렇게 바쁘고, 조급할까.. 회사도 안 다니면서도 이것 하나 스무쓰하게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회사만 안 다니면, 아이들을 잘 케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생각도 잠시, 겨울은 휴대폰을 들었다. 며칠 전부터 하린이가 깨진 어금니 사이로 음식물이 낀다고 짜증 부린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병원 예약 사이트를 열어 가능한 날짜를 확인했다. 제일 가까운 진료일도 한 달 뒤였다. ‘스웨덴이 그렇지 뭐..’ 라고 생각하며 날짜를 클릭했는데, 상세정보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처음 스웨덴에 왔을 때, 알게 된 중국인 아기엄마였다. 그녀는 이민을 온 지 십 년이 넘었고, 아이를 낳고 복직할 때쯤 치위생사로 근무하던 병원을 그만 둔다고 했었다. 그러고는 몇달 지나지 않아 그녀는 돌연 치대에 지원했다고 말했었다. 스웨덴 치대는 5년, 말은 안 했지만, 겨울은 지금 시작해서 언제 끝나려고 이 나이에 시작하나 싶었다. 겨울이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점심을 같이 먹으며 서로 나이먹어서 공부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치과의사가 되었나 보다. 겨울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내밀어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