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여기도 진로 고민의 끝은 의사인가?

멈춤, 다시 원점 6

by 노랑연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버스가 버스 정류장에 멈췄다.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두 정거장 남았지만, 겨울은 버스에서 내렸다. 해고 소식을 들은 뒤 다시 신청한 스웨덴어 중등과정 수업이 지난주에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해고 소식을 듣고 배신감을 느끼는 와중에 생각난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거면 빨리나 말해주지였다. 혹시 자신이 말한 조건이 안 받아들여지면 가려고 신청해 놓은 수업들은 1월 초에 시작이었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다 취소해 놨는데, 돌연 해고를 당하고 나니 이미 봄학기 수업은 시작해서 신청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5주 간격으로 시작하는 스웨덴어 중등과정만이 제일 가까운 옵션이었다. 무슨 일을 할지, 어떤 공부를 할지도 정하지 못했지만, 뭘 하든지 여기에 산다면 스웨덴어를 배워 나쁠 것은 없었기에 일단 신청을 해놨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가면서 겨울의 머릿속에는 계속 치과 예약 페이지에서 봤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 주 스웨덴 수업은 스웨덴어로는 “Yrke”, 직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정규직, 파트타임, 유급휴가‘ 같은 고용 관련 용어와 ‘적극적, 열정 있는, 주도적인 ‘처럼 입사 지원서에 쓸 수 있는 표현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잠깐 쉬는 시간이 끝난 뒤, 조별 토론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나눠준 종이 카드에는 이제까지 배운 직업들과 성격이나 기술들이 적혀 있었다. 돌아가면서 직업카드 하나를 뒤집은 뒤 펼쳐져 있는 성격이나 기술 카드 중에 관련 있는 거 찾아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15분간의 조별 토론이 끝난 뒤에는, 카드 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직업을 찾아서 필요 성격과 기술을 넣어 간단히 작문한 뒤 조별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전에 하는 수업을 듣는 탓에 수강생 중에서 소위 말하는 제대로 된 직업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남편이나 파트너 때문에 스웨덴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고, 다른 학교를 같이 다니거나, 카페 서빙과 같은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거기에서 유독 똘똘하게 수업을 따라가는 스무 살짜리 파키스탄 여자애가 있었다. 수업 중에도 항상 얇은 천을 머리에 두르고는 늘 앞에 앉아 선생님의 질문에 주저함 없이 대답하는 아이였다. 주제가 정해지자마자 그녀는 줄이 그어진 스프링 노트에 거침없이 내용을 적었다. 다른 조원들까지 모두 작문을 마치자 작문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하고 싶은 직업은 의사입니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건에는 냉철한 판단력과 책임감, 문제해결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습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빠르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해서 적절한 치료를 진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


계속 간호조무사니, 보육교사, 버스 운전기사 같은 직업만 듣다가 여기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들으니 신기했다. 다들 흥미가 생겨서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스웨덴어 고등과정과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완료하면 지원자격이 생긴다고 했다. 현재 배우는 중등과정을 마치고, 고등과정까지 마치려면 아무리 빨라도 1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내년 여름이나, 내후년 여름에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의사라..”

자격증이 있는 전문직. 보기에도 그럴싸하고 안정적인 직업. 십여 년 동안의 커리어를 인정받는 직업을 구하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 겨울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조건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고민하는 직장인들과 달리 얼마 전 개원을 한 대학동창이나 치과의사가 된 왕은 튼튼한 담장이 있는 성 위에 있는 듯했다. 겨울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있는 일인가? Yes. 하지만, 긴 준비 과정이 필요함, 대학입학 가능한 스웨덴어 등급인 SVA는 3까지, 수학 4까지 마친 뒤 입시에 지원해서 합격해야 함. 합격하면, 5년의 교육기간이 필요함

해야 하는 일인가? 당장은 No, 길게 본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

하고 싶은 일인가? 머리로는 Yes. 적어도 어디에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고, 안정적인 미래를 스웨덴에서 그린다면 하고 싶은 일. 그런데 마음은?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맞을까? 스웨덴어 등급부터 입시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6-7년은 걸릴 일인데, 그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하고 싶은 게 맞나? 평생 스웨덴에 살 생각을 하면서? 공부는 쉽지 않을 텐데, 그동안 애들은 또 방치하면서?


겨울은 또다시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왼쪽을 움직였다가 다시 입술을 납짝하게 만들었다. 대신 입꼬리가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크게 내쉬었다.


6월이 되면서부터 하준이는 혼자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매일 늦장 부리는 하린이를 기다리느라 뛰어가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새해 들어서 하준이의 학년에도 부모님 없이 등교하는 애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휴대폰도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큰 문제가 없긴 했다. 게다가 8시 15분까지 가야 하는 하준이와 달리 하린이의 등교 시간은 8시 30분였다. 하준이가 혼자 학교를 가기 시작하고 난 뒤, 그 15분 덕분에 아침시간이 조금 더 평화로워졌다.


‘몸도 못 가누던 신생아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커졌지?’


아이들의 나이 차이는 두 살. 하린이가 오빠랑 같은 시기에 등하교 독립을 선언한다면 2년 후, 만약 하린이가 그보다 더 일찍 오빠랑 함께 가겠다고 선언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겨울은 더 이상 아이들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겨울의 손을 필요하지 않을 시기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다가온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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