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시리즈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가을비로 찬 바람이 불면 억새는 더 푸석거린다. 덩그러니 홀로 있는 저녁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음성은 대뜸 알 수 있는 지인의 전화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문이 끝날 때쯤 서늘한 말을 한다. 이혼하기로 했다며 서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오래전부터 자식들이 결혼하면 이혼하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인의 자식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씁쓸한 소식이기는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 언젠가는 할 거란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지인은 남편이 효자 중의 효자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부모님과 형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쏟고 자신에게는 무관심한 남편이었다고. 늘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60세 가까운 나이에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수만 번을 더 생각했을 것이다. 그 깊고 깊은 속사정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드문드문 만날 때마다 남편에 대한 힘든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넘어져 긁힌 무릎처럼 아리고 쓰려 보였다. 그간의 맘고생의 크기를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다. 힘들 때나 기쁠 때 함께 하겠다는 약속,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답했던 기억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기야 요즘 주례사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혼이 많아 이 말이 사라졌다고 한다.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결혼할 때의 달콤한 사랑이 영원히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도 신혼 시절 꽃을 보는 듯한 사랑스러운 눈빛은 서서히 변했을 것이고 달라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뜨거운 사랑 대신 같이 살아낸 세월만큼 애틋한 마음이라도 서로에게 채워주어야 하거늘 어느 것도 채워지지 않은 듯하다. 사랑의 빈자리에 대신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지 아니면 긴 세월 이것저것 채워 보았지만 맞지 않아 결국에는 이혼으로 채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식지 않은 사랑은 없을 것이다. 미적지근해 버린 사랑의 자리에 따뜻한 관심과 소통, 더 많은 배려가 생겨나야 한다. 소통은 '준비, 대화 시작'이 아니다. 거창하게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머리를 뽀글거리게 파마를 하고 와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관심한 남편이 아니라 변한 모습에 농담 한마디라도 던져주는 관심이 필요하다. 서로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 “요즘 힘든 일 있어.”라고 묻는 관심이 소통이다. 행복도 노력해야 가질 수 있듯이 행복한 결혼생활은 어떤 것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어느 상담사가 “가슴에서 입까지의 거리는 30cm밖에 되지 않는데, 가슴속에 담아둔 좋은 생각들을 입 밖으로 표현하는 데 30년 이상이 걸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라고 말했다. 너무 늦지 않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내일 말고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