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시리즈 지나간 시간 속 모든 것들도
주말에 머무는 시골 옆집의 개 ‘신돌이’는 나를 보면 꼬리를 흔든다. 가던 길을 멈추고 이름을 부르거나 머리를 쓰다듬는다. 생선이나 고기를 먹은 날이면 생선 머리나 고기 한 점을 신돌이에게 가져 다 주는 재미도 있다. 멀리서도 냄새를 맡았는지 가까이 가기 전부터 꼬리를 흔들고 제 집 앞을 왔다 갔다 한다.
신돌이는 요즘 상상하는 반려견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흰색의 개이지만 한 여름을 빼면 누런 개다. 한 여름에만 씻어주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는 제 집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더운 여름에는 주인이 개집 앞에 설치해준 빨간 파라솔 한쪽 그늘 아래 누워 있다. 이런 날이면 가까이 가도 눈만 위로 치켜떠 볼뿐 일어나지도 않는다. 신돌이는 태어 난지 2달쯤 되어 무척 귀여운 모습으로 왔다. 물론 지금은 커다란 수놈의 개로 자라 그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가끔 만나는 동네 반려견이다.
반려는 짝이 되는 동무다. 시골집들 대부분이 대문이 없거나 있어도 대문을 늘 열어 놓는다. 그러기에 개를 마당 한편에 키우는 집들이 있다. 새로운 사람이 대문 앞을 서성거리면 주인에게 낯선 손님이 왔음을 알려준다. 낯선 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겁을 주며 이를 드러낸다. 아마도 밥을 주고 사랑해 주는 주인을 지키려는 의리가 아닐까 한다. 이런 행동은 주인이 나타나도 계속 짖어댄다. 주인은 믿음 가는 반려로 느낄 것이다. 신돌이가 그렇다.
나는 반려 견이 없다. 그 대신 마당에 꽃과 나무들을 심어 반려 견 못지않은 믿음과 기쁨을 받고 있다. 꽃이 피면 마치 주인을 반기며 꼬리는 흔드는 반려견 모습 같다. 초봄에는 떠나갈 날을 놓친 추위가 물오른 가지에 매달려 있다. 풀 죽은 추위 사이로 시골 마당 구석구석에서는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아우성을 내는 듯하다. 꽃샘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노란 수선화가 피고 돌 틈에 패랭이꽃은 작년보다 더 많이 피어 집을 더 봄답게 해 준다. 제자리에서 식구를 늘려 가는 무스카리의 보라색 꽃, 고개 숙인 금낭화, 작은 앵두꽃, 모과꽃도 마당을 채운다. 하얗게 피어나는 매화꽃, 향기 그윽한 라일락, 백일을 핀다는 백일홍, 하얀 서리가 내리는 가을 끝자락에도 국화는 마지막 힘을 내고 있다. 계절마다 다르게 시골 마당에 피어나는 반려 꽃들이다. 언제 만나도 즐겁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맞는 기분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꽃은 피지만 꽃이 지고 나면 멀리서 온 친구와 헤어질 때처럼 아쉽다. 다시 만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반려 친구. 여기서 반려 친구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친구 중의 친구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친구가 동년배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마음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 오래전 캐나다에서 옆집의 할아버지가 10살인 나의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친구라고 말했다. 친구는 나와 통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친구가 된다. 더군다나 일흔과 여든 살쯤 되는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됐다면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무슨 하늘과 땅 차이만큼 날까 싶다. 운 좋게 나이 들어서도 좋은 반려를 만나는 행운이 왔다면 늦복에 감사해야 한다. 멀리 있어 보고 싶은 친구들 가까워 자주 만나는 친구와 지인들이 나의 반려들이다.
늘 투덕거리며 살아온 반려자와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도 나의 반려이다. 딸이 “어린 시절 ‘황비홍’처럼 머리를 뒤로 넘겨 정수리에 묶어 주어서 눈꼬리가 올라갔다.”라고 말해 웃었다. 매일 아침 딸을 앞에 앉혀놓고 머리 묶어 주던 지나온 시간도 나에게 무척 소중한 반려이다. 속상했던 일에 눈물 흘렸던 시간도 좋은 일에 웃었던 지나온 세월도 여전히 나를 지탱해 주고 항상 나와 함께하는 반려이다. 시골집 마당의 꽃들과 가끔 서점에서 집어 든 책들과 나의 글들도 앞으로 좋은 반려가 될 것이다. 소중하다 생각되는 모든 것들은 반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간직한 반려도 중요하지만 같이 해야 할 반려를 찾는 것도 소홀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