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시리즈 멈춤의 미학
늦은 밤 일기장을 펼쳤다. 새로운 것들 앞에서 불안하고 허물어져 내릴 때 일기장을 꺼낸다. 한 장을 풀쩍 뛰어넘은 일기와 몇 줄로 쓴 가벼운 일상이 있다. 지나간 일기를 본다는 것은 세상 금 밖에 서 있는 나를 보는 느낌이다. 잃은 것과 얻은 것들이 흐르지 못하는 무거운 돌처럼 남아 있다.
남편 출근 후 커피를 마시며 TV를 켜고 여기저기 방송을 옮겨 본다. 몸 색이 변하고 눈동자가 180도로 움직이는 카멜레온처럼 나의 리모컨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한동안 보다 재미가 없어졌다. 컴퓨터를 켜고 신문을 읽는다. 밤새 일어난 별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했지만 별 내용이 없다. 한동안 신문 읽기에 몰두한다.
어느 여행가의 남해 여행 글을 보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박진욱이 쓴 ‘남해 유배지 답사기’가 생각났다. 서울에서 남해는 2000리(약 800km 밖) 정도 된다. 200여 년 전 류의 양이 남해도에 귀양을 갔다가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한 유배 기행문이다. 저자는 자전거와 두발로 유배지를 따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여행하고 기록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와 함께 여행을 했다. 남해대교는 거제대교와 달리 노량의 빠른 물살 때문에 동아줄을 달아서 놓은 현수교라고 부르는 줄다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위 대교를 저자와 함께 건너가는 것 같다. 남해의 아름다운 한려수도는 한때는 세상과 단절을 의미하고 정적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눈물의 바다였을 것이다.
서포 김만중은 경남 남해군 노도(櫓島)로 유배를 떠난다.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등은 모두 유배지에서 멈춤의 여유가 문학으로 태어났다. 저자는 “유배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물러남과 돌아감, 멈춤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형벌을 나에게 스스로 내려보기로 했다. 말이 험하지 간단하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끄는 것이 세상과의 단절이고 유배의 시작이다. 요즘 힐링을 한다며 몇 박 며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스스로에게 유배라는 형벌을 내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힐링을 위한 유배는 바쁘고 치열한 시간에서 물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차분하게 생각한다. 빠른 변화의 속도에 흔들리는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 흐트러졌던 삶의 지침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시간이다.
멈춤의 시간에 무엇을 보았는가. 멈춰진 시간에서 어제를 생각한다. 어제는 ‘그는 어제의 그가 아니다’라는 ‘지나간 때’를 말한다. 나는 어제와 무엇이 다른가. 어릴 적 저녁이면 종아리가 자주 아팠다. 엄마는 내 다리를 주무르며 키가 크려고 그런다 했다. 성장 통이라 말했다.
성장 통은 마음에도 있다. 타인으로 인해 아프기도 하지만 자신의 성격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춘기 아이들과 대화가 서툴렀던 나는 말로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도 했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낼까 불안했다. 그즈음 가깝게 지내는 지인과 함께 심리학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으며 ‘공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지만 어색했다. 나는 ‘공감’이 서툴렀고, 태생적으로 적게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공감하지 못하는 소통은 한계가 있었다. 한겨울 뻑뻑한 피부에 로션을 발라 매끄럽게 하듯 심리학 수업은 말라버린 마음에 단비였다. 다른 사람의 감춰진 마음을 읽으려 했고 이해하려 했다. 아이들과 대화는 점점 부드러워졌으며 타인과의 관계도 ‘공감’이 큰 윤활유 역할을 했다. 잠시 멈추고 돌아간 일기장 한편에 적힌 성장통이다. 어제의 일이었고 지금의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과거를 통해 현재로 왔으며 미래로 갈 것이다. 흐르는 세월이 어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장 통이 동반된 세월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대추가 빨갛게 익어가며 진한 대추 향이 나듯 성장 통으로 사람이 익어 사람 냄새가 난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중 “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처럼 내 성장 통에도 태풍, 천둥, 벼락이 있었다. 대추가 매해 열리듯 나의 크고 작은 성장 통은 멈추지 않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 보다 불어난 나이만큼 넉넉한 사람 냄새를 풍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