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시리즈 부산한 자가 높게 평가받는 세상
시골집 마당에서 넘어졌다. 한 손에는 병을 잡고 있었다. 병이 깨질까 어정쩡한 자세로 넘어지니 무릎과 한쪽 손 피부가 깊게 벗겨져 피가 났다. 병은 깨지 않았다. 엄지발가락이 욱신 거린다. 오므리고 펴고 해 보니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바쁜 도시를 떠나 주말이라도 여유롭게 지낼 생각으로 시골집으로 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곳에 가서도 바쁘게 걷다 넘어졌다. 넘어질 곳도 아니었다. 분주할 시간이 지나고 느긋할 대로 느긋할 수 있는 대낮같이 훤한 5월 저녁 무렵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서두르다 실수할 일이 아님에도 실수하여 난처한 상황이 된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다. 일어나 현관 앞 계단에 앉아 피나는 무릎과 손을 보며 아프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넘어질 곳이 아닌데 왜 넘어졌나. 왜 발걸음을 재촉했을까. 무엇 때문에 서둘렀을까. 빨리 들어가야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지하철을 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빨리 하려다 탈이 난 적이 이번뿐 이겠는가. 음식을 만들다가도 서두르다 보면 간장병도 엎지르고 소금도 쏟고. 그러면 그것이 치우느라 더 느려지데 꼭 일을 치르고서야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다음날 여전히 아픈 엄지발가락은 검은빛이 도는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손등에 상처는 붉은색으로 파여있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에 조르지오 아감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고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능력자가 된 세상에서 잠시라도 마음의 평온을 찾겠다고 분주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향한다. 자연으로 향했다고 모든 분주함이 사라질까. 여전히 눈이 휴대폰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분주함은 그대로이지 않을까. 그곳에 가서 어떻게 머무는 가에 달려 있다.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분주함을 벗어나려면 눈과 마음이 단조로운 곳에 머물러야 한다. 산에 가면 산을 보고 물가에 가면 물을 바라보며 관조적 시간을 가지면 된다.
마음이 부산할 때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비스듬히 젖히고 의자에 앉거나 누워 있기도 하지 않나. 떠다니니 것, 금세 사라져 버릴 것에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잠시 쉬고 싶은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채우는 관조적 시간을 가지기 위해 온 시골집에서 넘어질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니. 넘어지고 살갗에 피를 보고서야 뻐꾸기 소리 현관 앞에 보리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