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시리즈 나의 놀이터에 나이가 무슨 상관
라디오에서 한때 유행했던 가수 최성수의 ‘동행’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사 중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나에게 묻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뭐라 답할까.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가족 하고만 동행을 할 수는 없다.
법정 스님을 말했다. 어릴 적 친구는 놀이터에서 나와 잘 노는 친구가 좋은 친구였다면 점점 나이가 들면서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변한다고. 세월은 몸으로 노는 작은 놀이터에서 마음으로 놀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놀이터로 옮겨졌다.
우리는 함께할 사람이나 무언가를 찾는다. 그래서 결혼도 생각하고 평생 할 일을 찾기도 하며 아무 말 없이도 곁에 있어 줄 반려견이나 반려 식물을 곁에 두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꼭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동행을 해야 하냐고. 인생이 여행이라고 하던데 혼자 여행도 홀가분하다고.
동행이 없다면 삶이 허전할까 아니면 신경 쓸 일 없어 편할까. 요즘 같은 시대에 갈팡질팡 할지도 모른다. 서로 진심을 주고받는 사람과의 동행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선다는 말이 있다. 득실을 떠나 마음을 다한다는 말일 것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발 벗고 나서는 정도는 아니어도 신발 신은 채로 양말 신은 채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반대로 나도 발은 벗지 않았지만 신발, 양말 신은 채로 누군가의 힘든 일에 나선 적은 있는가도 물어야 한다. 그런 적이 없으면서 발 벗고 나서 준 친구가 없다고 불평만 한다면 얌체 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다. 나에게 자신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입을 삐죽이며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데 그 사람을 보면 그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면 법정스님 말대로 아무 데나 마음을 주는 헤픈 사람이거나.
사람 아닌 반려를 택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갑이 되는 것이다. 선택권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반려로 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과의 동행은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았을 때 된다. 동행할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동행할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반려견이며 반려식물을 곁에 두는 것도 좋지만 사람과 동행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꽃보다 아름다운 동행할 친구를 나이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나이가 많다고 나이만큼 성숙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철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30살이나 35살이나 60살이나 65살이 친구가 된다한들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가족이 서로 나이가 같아서 동행하겠는가.
나이와 상관이 없이 서로 울어주고 웃어주는 따뜻한 동행이 될 사람을 나의 놀이터에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