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개의 선물 108번째, 비자를 받고 오다
오늘은 함부르크 웰컴 센터에 비자받으러 가는 날. 요 근래 두 번이나 갔더니 이제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해졌다.
고 생각했는데 건물 안에 들어가서 다른 사무실 창문을 잘못 보고는 웰컴 센터가 오늘 문을 닫은 줄 알고 1초 동안 잠시 멘붕에 빠졌다.
혹시나 빨리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고, 늦어서 좋을 게 전혀 없으니 예약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문이 닫혀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닫고 웰컴 센터 정문을 잘 찾아가서 이름을 말하고 예약된 시간을 말했더니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함부르크 웰컴 센터는 다른 곳과는 대기 방식이 조금 다르다. 보통은 번호표 같은 걸 나눠주고 전광판에 번호가 뜨면 해당하는 곳으로 가면 되는데, 여기는 그냥 좁고 기다란 복도에 놓인 소파에 앉아 대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 직원이 나와서 이름을 부른다. 간단한 업무 같은 경우, (임시 비자를 받거나 무언가를 찾으러 오는 경우) 따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다 보면 직원이 서류를 가져다주고 끝난다. (임시 비자를 받을 때, 너무 허무하게 끝나서 당황했던 경험이 새록새록)
하지만 이번에는 새 비자를 신청하는 일이니 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약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내 이름을 부르는 직원이 없었다. 그동안 인포 데스크의 직원이 다른 사람으로 한 번 바뀌기도 했던 터라, 다시 한번 인포 데스크에 가서 이야기를 했다. 내 앞에 클라이언트와의 업무 처리가 지연돼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보통 이런 일에 독일어를 잘하는 친구 한 명쯤 데려가면 좋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런 예약은 평일 낮에 잡히기 때문에 대부분 일하고 있는 내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래서 영어가 잘 통한다는 함부르크 웰컴 센터로 왔다. 그래도 혹시나 담당 직원이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급 걱정이 들어 친한 독일인 친구에게 긴급 상황에서 전화를 해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역시나 친구의 회의 시간과 겹쳐서 아쉽게도 되지 않는 상황. 그래도 내가 신청하는 비자는 상황이 복잡하거나 어려운 비자는 아니라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했다. (걱정 많은 이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였을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약 시간을 지나고 30분이 다되어가도록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까부터 한 여직원이 부지런히 사무실 안쪽과 로비를 오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내용을 전달해 주는데, 제일 먼저 온 나는 왜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것인가. 시간 개념이 철저하다는 나라의 관공서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리고 있자니 우리나라의 1시간처럼 느껴졌다.
혹시 ‘직원이 너무 바쁜 나머지 나를 잊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한 번 더 말해봐야 하나?’, ‘인포 아저씨 생긴 게 너무 무서운데’ 등등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Frau Park” 하고 박씨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JA!!(네!!)”를 외쳤다.
직원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비자 업무는 직원을 잘 만나야 된다고 하던데, 좋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었다. 직원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작은 로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나뉜 작은 사무실들이 나왔고, 그 사무실들 앞에는 또 소파들이 놓여 있었다. 직원은 자신의 사무실 앞에 있는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하며, 준비해 온 서류들을 달라고 했다. 나는 여권과 여권 사진, 재정 증명서, 보험 확인서, 어학원 등록증을 건네줬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시 2년짜리 비자로 받을 수 있나요?”라고 물어봤더니 내가 제출한 서류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녀는 간단히 내 서류들을 훑어보더니 1년만 가능하다고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으로 나는 2년을 받겠노라고 주문을 외워왔던 터라 갑자기 힘이 툭하고 빠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보고 갸웃하며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 이유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은 채 일단 소파에 앉아서 또 다른 기다림을 시작했다.
작은 사무실은 벽에 반투명 스티커 같은 게 붙어 있어 안이 반쯤 보였다. 나를 담당하는 직원이 일하는 곳에는 또 다른 직원이 다른 사람을 응대하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걸 보니 비교적 간단한 업무 처리인 것 같았고, 안에 있는 사람은 뭔가 자꾸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걸 보니 더 복잡한 일인 것 같았다. 2년 비자를 받게 되리라고 너무 많이 기대했던 탓인지 나는 몇 분간 힘이 쭉 빠져있었다. 사실 원래 1년을 받는 게 맞는 거고, 정말 운이 좋은 경우에 2년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1년이 왜 이리 짧게 느껴지는지. 나중에 더 좋은 비자받으려고 아껴두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데, 직원이 나와서 비자 증명서를 스티커로 받고 싶은지 플라스틱 카드로 받고 싶은지를 물었다. 스티커로 받게 되면 지금 바로 여권에 붙여줄 수 있고 가격은 56유로, 카드로 받게 되면 받는데 2~3주 정도가 걸리고 가격은 100유로가 넘는다고 했다. (원헌드레드 하는 순간부터 뒤에 숫자는 귀에 안 들림...) 워홀로 1년간 살면서 딱히 신분증 보일 일이 많이 없었던지라 나는 망설임 없이 스티커로 받았다. 그리고 몇 년 거주도 아니고 1년짜린데 플라스틱 카드를 받겠다고 십만 원 넘게 돈을 내는 건 너무 아까웠다.
다시 일처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여권을 들고 나오더니 “이 페이지가 몇 번째 페이지예요?”라고 물었다. 나도 여권을 유심히 본 적이 없어서 얼결에 눈을 이리저리 굴려 구석에 페이지 색깔과 비슷하게 새겨져 있는 '19'라고 쓰인 숫자를 찾아서 읽어줬다. 아마 페이지 넘버가 다른 문서 페이지처럼 검정 폰트로 쓰인 게 아니라 디자인에 녹아있어서 못 찾았나 보다. 그래도 꽤 크게 적혀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한 자기가 부끄러웠는지 이마를 탁 치며 쑥스러운 듯이 웃으면서 다시 들어갔다. 관공서 직원이라고 딱딱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은근히 귀엽다고 생각하며 옆에 있는 몇 가지 정보성 서류들을 하나씩 집어 서류철에 챙겨 넣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니, 직원이 다시 나와서 여권과 확인이 완료된 서류들을 돌려주면서 하얀색 플라스틱 카드를 같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독일은 관공서에서의 결제 처리도 참 특이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담당 직원에게 바로 결제를 할만한 일들을 결제 기계를 따로 두고 쓴다. 그래도 전에 다른 관공서에서는 현금 결제면 직원에게 할 수 있고, 카드 결제면 ATM처럼 생긴 기계로 가서 해야 했었는데, 여기는 현금도 카드도 모두 ATM같이 생긴 그 기계에서 해야 하는 것 같았다. 기기는 멀지 않은 복도 끝에 있었다. 예전에 거주지 등록을 할 때 해본 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직원이 준 하얀색 카드를 집어넣고 현금이나 카드로 결제를 하면 영수증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카드를 넣으면 가격은 자동으로 표기되는 것 같았다. 56유로, 한화로 7만 5천 원 정도 하는 수수료를 지불하고 나온 영수증을 직원에게 가져갔다. 하나는 직원이 갖고, 내게도 영수증을 주었다.
직원이 설명해주는 내가 1년을 받는 이유는 이랬다. 지금 내 서류로는 어학원이 1년 치 등록이 되어 있어서 1년 이상을 줄 수가 없고, 인텐시브 코스(어학 코스 이름) 자체가 1년 이상 수강할 수 없는 거라서 어학원 기간을 늘리지도 못하니 1년밖에 못준다고 했다. 직원은 아까 나의 질문과 얼빠진 표정이 신경 쓰였었는지 1년간 어학원을 다니고 나서 그때 학교를 다닐 준비를 하게 되면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 (extension이라고 했다!) 다시 비자가 끝나기 3개월 전에 연락하라고 했다. 연락만 일찍 주면 모든 게 제대로 마무리될 때까지 임시 비자도 주고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뉘앙스였다. 직원의 친절한 배려와 설명에 2년을 받지 못해 실망했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굿바이 인사를 하고 웰컴 센터를 나와 시청 광장의 풍경을 즐겼다.
날씨도 어찌나 좋은지 알스터 호수에는 감미로운 기타 소리와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이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배터리가 없어서 영상으로 남기지 못해서 너무너무 아쉬웠다.
꿀이 뚝 뚝 떨어지는 날씨의 함부르크를 걷고 있자니 이렇게 1년씩 비자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지난 워홀의 1년과 이번 1년 비자를 같이 받아 한 번에 2년 이었다면, 어쩌면 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허비하는 시간이 더 많지 않았을까.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 소중하게 사용하라고 더 값진 1년을 선물받은 느낌이다. 이러니 지금의 행복에 더 집중할 수 밖에. 늘 그렇듯이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을 향해 걷는다.
ps. 함부르크야, 새로운 1년도 잘 부탁해! :)
글: 노이
사진: 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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