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 랜드, 그 곳에 가면 널 찾을 수 있을까
꿈을 꿀 때는 늘 함께 했던,
꿈을 포기했을 때는 사라졌던,
노래.
도입부부터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리듬에 춤까지 화려하다. 내가 저 속에 있었다면 같이 들썩이고 싶을 만큼 온몸이 들썩거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 영화에 언제부터 노래가 있었나, 경쾌하였나 잊어버린 채 노래를 잃은 주인공들에게 몰입하여 함께 울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의 큰 고비가 찾아온 뒤, 여주인공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그때 나도 모르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노래를 안 불렀었지? 그래, 노래를 불러야지!'
다소 지겨워질 수 있는 부분이 영화 중반에 존재하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배배 꼬게 되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의도된 연출이었구나 싶다.
영화는 처음부터 중반부까지 신나는 리듬의 노래와 춤들로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후반부에 다시금 노래를 들으면서 설레게 하기 위해서 중반부를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길게 늘어뜨린 느낌이랄까.
이것은 마치
'쓰라린 이별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을 때
잊고 있었던 설렘을 다시 느끼는 기분',
'꿈 따위 포기하고 사회에 타협했는데,
아직도 뛰고 있던 숨은 내 열정을 느끼는 기분',
'쿵'하고 설레는, 두근거림의 출발선에서
'땅'하고 울리는 총소리를 들으며
막 첫 발을 내딛는 그런 느낌
우리의 삶이 24시간 내내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 24시간 중에 행복한 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화를 볼 때 2시간이 내내 재밌을 수는 없겠지만, 그 2시간 중 내 마음을 울린 순간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마음이 울린 순간이 지루한 순간보다 더 많았다.
아니 사실 그 시간은 지루했다기보다 '보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 '피하고 싶었던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운명 같았던 사랑이 깨지고 부서지고, 소중하게 키워온 나의 꿈이 짓밟히고 쓰러지는 순간을 공감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루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집으로 갈 거야
달려가다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우리는 진짜 집으로 돌아간다.
부모님의 품.
미아의 행동에 공감이 가면서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난 어디로 가서 내 마음을 뉘일 수 있을까. 그전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나.'
나는 성인이 되면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의이지만, 그래도 살다가 내 인생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을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부모님이 계신 집이다. 한 번도 그 안식처를 잃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영화에서도 부모가 돌아가시는 게 아닌데,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의문이다. 아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거겠지. 나만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구나. 예전엔 그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장면들까지도 말이다.
무한도전보다 중요한 것,
무한응원
살면서 도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중요한 만큼 어렵기도 하다.
날아오는 돌들에 맞거나 구덩이에 빠지면서 다시 도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우리의 길에 도전해보기도 전에 옆 사람이 돌에 맞고 구덩이에 빠지는 걸 보면서 지레 겁을 먹은 채 나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도전이라는 것은 소중한 가치이고, 그래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도 시청자들의 오랜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무한도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무한응원이다. 무한도전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도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무한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인생에 절실한 것 또한 내 사람들의 나에 대한 믿음과 나를 향한 '무한 응원'이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 지칠 때까지 말해주는 세바스챤을 만난 미아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두 가지 엔딩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인연들은 각자가 서로의 인생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
... 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이 내 생의 끝까지도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돼버리는 걸까. 이 영화도 그것을 말하고 싶은 걸까. 결말에 이르러서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전개되는 또 다른 결말에서 감독은 우리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준다. 사실은 해피 엔딩인 건가?
그리고 또다시 현실로 돌아와 결국 그것은 '바람'일뿐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결말은 이렇다. 마치 상상처럼 흘러갔던 또 다른 엔딩의 장면들을 잘 돌이켜 보면 전혀 허무맹랑한 전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더 오래 함께 하는 인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두며 살아왔던 삶의 선택의 끝이 꼭 '이별'이 아니라 '좀 더 오래 같이 행복한 사랑'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우기듯이 추측해 본다.)
꿈을 꾸는 자,
꿈을 꾸지 않는 자.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는 또 그렇게 하겠대요.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꿈꾸는 누군가를 위하여 -
상처받은 가슴을 위하여 -
엉망진창인 우리 인생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