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의 어느 날, 수아는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한 달에 100만 원 남짓되는 월급을 쪼개어 모은 돈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그만큼 예기치 못한 일들로 몸고생, 마음고생을 잔뜩 하고 난 7일째 아침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제 일어났다. 어제는 프라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까를교의 야경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신호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건너버리고 싶을 정도로 작은 횡단보도를 지나면 곧 까를교의 시작 지점이었다. 하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수아는 눈앞에 까를교를 두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까를교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온통 신경이 쏠렸던 수아는 어깨에 걸친 자신의 숄더백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무게가 실렸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뺀 것이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어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코와 귀에 걸린 피어싱과 보기만 해도 뻣뻣해 보이는 히피 머리. 말로만 듣던 동유럽의 집시 같았다. 수아는 당황해 가방을 뒤졌으나 지갑이 없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집시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지갑에는 남은 3주간의 여행 기간 동안 써야 할 여행비가 모두 들어있었다. 숙소도 사람들이 다 함께 쓰는 민박집이었기에 두고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용기를 내어 그들을 쫓아갔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두운 다리 밑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수아의 눈에는 더 이상 까를교도, 프라하의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 앞이 온통 캄캄해졌다. 그나마 사용이 익숙지 않아 쌓이고 쌓이는 동전들을 차마 장지갑에 다 넣을 수가 없어 따로 동전지갑에 넣어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럽에는 아는 이 하나 없었고, 한국인 민박집주인은 경찰에 신고해보라는 말은 했지만 쉽게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죠."
따뜻한 위로와 함께 민박집 아저씨는 라면을 한 그릇 끓여내어 주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도 몸은 익숙한 라면 냄새에 이끌려 식탁 앞에 앉았다.
라면을 후루룩후루룩 집어삼키며 수아가 말했다.
"저 진짜 바보 같아요. 어떻게 누가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 것도 몰랐을까요. 오늘 점심 기차로 이제 떠나야 하는데, 어차피 신고도 못할 것 같아요. 저 이제 어떡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 돼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수아는 어쨌든 미리 결제해둔 기차표와 함께 다음 목적지의 숙소까지는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다음 목적지는 프라하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체코와 근접한 어느 독일의 남쪽 지방의 한 작은 도시였다. 기차를 타고 조금씩 이동하면서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며칠씩 숙박을 하며 이동하면서 여행을 하다가 끝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부르크까지 가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쨌든 가보자. 잠잘 곳이라도 있으면 됐지 뭐.'
그녀가 묵기로 한 숙소는 작은 농장을 운영하는 집으로 에어비앤비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머물기로 한 기간은 일주일.
생각거리와 고민거리가 많았던지라 관광객도 없고, 자극적인 것도 최대한 적은 곳에서 조용히 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고른 곳이었다.
하지만 설상가상.
내가 도착한 날 그 집에서 키우던 말이 크게 다쳐서 집의 주인인 아주머니 한 분과 딸은 말을 데리고 큰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우리에게 말은 정말 가족 같은 존재거든요. 우리가 없는 동안에 집에서 그냥 지내도 상관은 없지만, 제가 챙겨줄 수가 없으니 신경이 쓰여서 이 동네의 제 유일한 친구인 앤에게 당신을 좀 묵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놨어요. 여기 주소가 있으니 찾아가 봐요. 빨간 지붕만 가득한 이 동네에서 유일한 초록지붕 집이니까 모르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알 거예요."
이미 도둑맞은 지갑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은 완전히 꼬일 대로 꼬여가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수아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주먹에 쥔 채 캐리어를 끌었다. 그녀의 말대로 초록지붕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캐리어를 끌고 걸어서 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에 멈출 수는 없었다. 곧 있으면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래서 수아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을 운반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초록지붕 집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위급한 일이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살릴 약을 운반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그 사람은 영영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 거야.'
종종 힘든 일을 해야 할 때 수아가 써먹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치 자기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면서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초록지붕 집은 작은 숲에 둘러싸인 공터 안에 자리 잡은 2층 집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1층이 카페였다. 테이블이 서너 개 들어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수아는 조용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며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
그러자 부엌 안쪽 벽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진초록색의 원피스를 쫙 빼입은 적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죄송해요. 오늘 영업은 끝났어요."
독일어라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어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수아가 카페를 찾은 손님인 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 그게, 에어비앤비 주인아주머니 연락을 받고 왔는데요."
"아, 그럼... 수아 씨? 오느라 고생했어요. 일단 짐을 풀어야 할 테니 방으로 안내해 줄게요."
다행히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꽤 친절해 보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캐리어와의 사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층에 묵게 될 방까지 오르기 위해 계단을 낑낑거리고 올라야만 했다. 짐을 함께 들어주겠다는 친절한 도움의 손길을 동양인의 예의로 거절한 것이 잘못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수아에게 또 한 번 따뜻한 손길이 주어졌다.
"전 지금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원래 이 에어비앤비에는 식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지라, 가지고 온 돈을 탈탈 털린 지금 매일 빵을 사 먹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다시 그녀를 따라 내려간 부엌 안쪽은 카페의 테이블과는 다른 다소 뭉툭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전 앤 이라고 해요. 이름 끝에 'e'가 붙는 앤 이에요."
앤...? 이름 끝에 e가 붙는 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곳은 초록지붕 집. 그리고 저 여자의 머리 색깔은 갈색이 섞여 있긴 하지만 분명한 빨강 머리.
어릴 때 보았던 빨강머리 앤과 너무도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수아는 깜짝 놀랐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음식이 차려질 때까지 수아는 이름 끝에 'e'가 붙는 앤에게 만화 속, 아니 소설 속 빨강머리 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 무엇보다 지금은 빨리 배를 채우고 침대에 드러누워 쉬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사실 여기 오기 전에 프라하에서 지갑을 도둑맞았어요. 그래서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3주나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생각해 보려고요."
앤이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수아가 너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체질인 탓인지 앤은 수아의 낯빛을 금세 읽었다. 사실 수아는 지금 누가 봐도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갑을 도둑맞은 건 많이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여행 기분까지 망치진 말아요."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잘 안돼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제가 얼마나 힘들게 모은 돈인데요. 없는 돈에 정말 아껴가며 모은 돈이었어요. 게다가 아직 여행 기간이 3주나 남았는 걸요. 남들은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전 하는 일이 길게 쉬기가 어렵고, 돈도 넉넉지가 않아서 이번엔 정말 큰 마음먹고 온 거였거든요. 그치만 이제 끝이에요..."
수아가 꼭 감정이 예민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절망적일 순간이었다. 수아는 정말로 마치 세상이 다 끝난 것 마냥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전 수아씨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앤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네? 제가 운이 좋다구요? 혹시 지금 제 얘기를 잘못 알아들으신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수아씨의 속상한 마음은 저도 충분히 공감해요. 하지만 저는 수아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아씨가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힘들게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이 곳에 온 것 자체만으로도 일단 수아씨는 목표를 달성한 거예요. 사람들은 그래요. 마치 돈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아요. 여행은 돈이 많든 적든 떠나는 그 자체 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룬 셈이니까요. 수아씨는 돈이 없어도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경험을 할 소중한 기회를 얻은 거예요. 그건 커다란 불행을 가장한 보석 같은 경험이죠. 그리고 그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에요. 누구든 일부러 돈을 도둑맞을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게 운이 좋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초승달이 나란히 놓인 듯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누군가의 고난을 하나의 반짝반짝 거리는 희망으로 바꿔버리는 이 마법 같은 앤 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수아는 잠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수아는 자신이 겪은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마음껏 힘들어하고 투정을 부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앤의 말이 맞다고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냐-옹.'
그때 오렌지빛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수아의 무릎 위에 올라앉더니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자신은 여기서 잠을 잘 테니 수아는 꼼짝 말고 침대 역할을 하라는 듯이 당당한 태도였다.
수아는 마치 앤의 마법에 몸과 마음이 모두 이 곳에 묶여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은 기분이었고, 어쩌면 이 곳으로 오게 된 불운 조차도 사실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운 좋은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앤은 그런 수아의 표정을 다 읽고 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머리칼과 닮은 색의 와인을 한 병 꺼내왔다. 왠지 이 곳에 머무르게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수아였다. 별들이 앤과 수아를 위해서 밤을 길게 늘어뜨릴 것만 같은 조용한 초저녁이었다.
늘 에세이 형식만 쓰다가 평소와 다른 글에 의아하실 구독자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이 글은 브런치에서 진행 중인 "2019 빨강머리 앤 글/그림 작가님을 찾습니다." 프로젝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제가 아닌 다른 소재를 가지고 상상 속 이야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거의 15년만의 일이라 녹슨 기계를 돌리기까지 기름칠을 하는 데 시간을 참 많이 쓴 것 같네요. 빨강머리 앤을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빨강머리 앤의 어린 시절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있다는 것도 이번 기회를 통해 알았네요. 혹시 조금이라도 앤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콘테스트 응모 여부를 떠나서 어른이 된 지금 다시 한 번 빨강머리 앤을 만나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역시 같은 책도 읽는 사람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읽히기 마련이니까요. 어릴 때와는 다른 숨어있는 많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도 한 번 더 그 감동을 느껴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