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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07. 2020

어떤 독일인이 날더러
꺼지라고 했다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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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첫 날. 일기예보대로라면 내가 라이프치히에 도착할 즈음부터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올 예정이었으나 날씨 요정이 도와준 건지 웬일로 더울 정도로 해가 쨍쨍했다. 좋으면서도 고민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또 원래가 시험을 보러 온 것 이기 때문에 조용한 카페에 가서 다음 날 아침에 있을 시험 준비의 마무리를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카페를 가든 식당을 가든 뭔가 먹고 앉아서 공부를 하자는게 내 계획이었는데, 하지만... 날씨가 이렇게 좋아버리면 마음이 심하게 휘청거린다. 나는 보통 처음 가는 도시에 가면 그 곳의 공원을 걸어다니는 취미가 있는데, 구글 맵을 훑어보니 마침 중앙역에서 30분만 걸으면 꽤 큰 규모의 공원에 도착할 수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중앙역 입구 앞에 서서 한참을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논쟁을 벌였다. 



'시험 준비 마무리를 잘 해야 독일에서 더 오래 지내지 않겠어? 미래를 생각해! 라이프치히는 나중에 또 와서 제대로 구경하면 되니까 어서 가서 공부나 하자!'



'여행으로 오고 싶었으면 벌써 여길 와봤겠지. 시험이 아니면 여길 올 생각이나 했어? 아니잖아. 나중따윈 없어. 날씨도 이렇게 따라주잖아. 그리고 원래 시험 전날엔 공부하는 거 아니라구. 그리고 어차피 지금 코로나 때문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식당도 별로 없잖아?'




20여분이 흘렀을까. 결국 악마(?)쪽이 승리했다. 호텔에 체크인만 해두고 조금은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구글 지도에서 말한 30분보다는 한참 더 걸렸다. 걷다 보니 여기가 관광 명소고 저기가 유명한 공연장이고 그런 풍경의 연속이었다. 코로나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긴 했지만 걷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볼거리가 적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함부르크와는 전혀 다른 라이프치히의 분위기는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제대로 된 식사는 못하더라도 배는 채워야겠기에 미니 피자를 파는 가게에서 마카로니 피자를 사서 앉아서 먹을 만한 벤치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오페라 공연장인 듯한 건물 앞에 아주 널찍한 광장이 있었다. 한쪽에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긴 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반대편에는 어떤 중년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 혼자만 앉아있었다. 나름 사람 많은 곳을 피하려고 인적이 드문 벤치로 가서 앉았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피자를 두 입 정도 베어먹었을까 혼자 앉아있던 그 여자가 갑자기 허공에다 대고 아주 목청 좋은 목소리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거기에 경찰은 없었지만, 경찰을 부르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격하게 내질렀다. 그러고도 계속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옷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했다.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픈 배를 채우는게 우선이었던지라 개의치 않고 피자를 한 입 더 베어물었다. 그러는 동안 내 옆에는 젊은 남자 일행도 두어명이 와서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 앞에 뿌연 먼지가 크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바로 뒷 편에서 땅을 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허걱'. 나는 서둘러 피자를 다시 종이봉투안에 넣고 입구를 꽁꽁 싸맸다. 여기서 먹기는 틀렸구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데 갑자기 목청 좋던 그 여자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서 또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1년 전의 나였으면 단 하나도 못알아들었을 것이기에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겠지라고 위안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하필 내가 아는 단어였다. 뭐 좋게 말하면 '사라져버려!'였는데 어감은 거의 '꺼져버려!'의 느낌이었다. 오잉? 갑자기? 당황해서 "저요?"라고 되물었지만 내 말을 들은 건지 못들은체 하는 건지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검은색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시선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남자 일행들도 같이 황당해 하면서 나와 그 여자를 쳐다봤다. 뭐 어쨌든 더 이상 아무 말이 없길래 가방을 메고 자리를 떠나는데 또 등 뒤에다 대고 뭐라고 뭐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왜 이 쪽 벤치가 텅텅 비어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고 나에게 하는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서 그 여자를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더 기세등등해졌는지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 확실히 나를 향하고는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갑자기 소리지르는 통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여자를 쳐다봤다. 그냥 무시하고 가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저 여자의 무례한 이 행동이 만약 코로나 사태 속 심각해진 아시아인 인종 차별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못난 내 자존심...) 사실 가장 좋은 건 그냥 교육을 제대로 못받았나보다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내가 만만하게 보이면 저 여자가 또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쉽게 저러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강력한 대응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로 되돌려줄 만큼의 독일어 실력도 깡도 없었지만, 나도 이대로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의 인종 차별 때 꽤 효과를 봤었던 '촬영 스킬(?)'을 사용했다. 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찍는 건 안된다고 하지만, 저 사람이라고 아무에게나 욕을 해도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차라리 내 눈 앞에 와서 따지고 들면 경찰이라도 부를 텐데 묘하게 나와 거리를 두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우스웠다. 계속 떠들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여자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자 갑자기 조용해지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여전히 마음이 찝찝했다. 아니길 바랬다. 나에게 또는 아시아인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가 아니길 바랬다. 욕심이겠지만,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고 싶었다. 이 경험에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가는 오늘 하루도 내일 시험도 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분이 덜 풀린 것도 같았다. 머리로는 무시하면 된다는 걸 알아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가라앉히기 쉽지 않을 때가 있고, 이 때가 딱 그랬다. 그래서 다시 뒤로 돌아 그 여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자가 또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 여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또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이 동양인은 아니었다. 그러자 내가 오해한건가? 싶기도 했다. 무슨 얘길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상은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자 제정신도 아닌 사람에게 맞장구를 쳐준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법륜 스님이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잠을 자는 사람이 잠꼬대로 내 욕을 한다고 해서 멱살을 잡고 싸우지 않아요. 잠꼬대인 걸 아니까요. 우리 삶도 똑같습니다.' 저 여자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잠꼬대나 다름 없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던 것 뿐, 내가 거기에 반응을 해봤자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 속에 남아있던 화가 사르르 녹아없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독일이라는 나라 전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동안 독일에서 배려심 많고 친절한 사람들을 더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저런 캐릭터를 만난 것이 더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다음에 저런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때는 웃으며 지나칠 수 있을까.




어쨌든 내 마음이 다시 편해졌으니 되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렇게 도착한 공원에서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왔다. 그 이야기는 내일 계속 하기로 하고,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여러분도 이런 애매하게 화가 나는 말을 듣는 순간이 온다면 이렇게 생각해보길 바란다. 저 사람은 그냥 자기 세계에 갇혀 꿈을 꾸고 있고 그래서 저 말은 모두 잠꼬대라고.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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