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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15. 2021

뭘 봐, 아가씨



독일의 대학교 수업은 대부분 비대면이다. 특수한 경우에는 종종 학교에 나가기도 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 학교는 지금까지 100%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다. 애초에 독일은 대학교 캠퍼스라고 할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를 너무 못 가니 독일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던 즈음,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학생증을 들고 '인증'을 하러 오라고 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오라고 하니까 가기로 했다.



월요일 오전 시간이라 지하철은 제법 한산했다. 워낙 외출을 안 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안내방송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몇 명 되지 않던 사람들도 센터에서 내려서 지하철은 텅 비었다. 15분쯤 달려 학교에 도착하니 학생증을 정체 모를 기계에 넣으라고 했다. '지이이잉' 하는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내 학생증은 한참을 기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물으니 학생증의 유효 기간을 업데이트하는 것이라 했다. 알고 보니 내 학생증에 적혀있는 유효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지이이잉'하는 소리가 끝나고 다시 튀어나온 내 학생증에는 다음 학기가 끝나는 올해 9월까지로 유효 기간이 연장되어 있었다. (독일은 학기 시작과 종료 기준이 한국과 전혀 다르다.) 입학할 때 한번 만들면 졸업 때까지 쓰던 한국 학생증과는 사뭇 달랐다. 좀 번거롭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학교에 올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래 봤자 학생증만 업데이트하고 나와야 했지만)





새롭게 더 반짝반짝 해진 것 같은 학생증을 챙겨서 다시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돌아왔다. 우리 학교 앞 지하철역은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아서 코로나와 상관없이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대의 역 안은 대부분 텅 빈 경우가 많다. 조명은 또 워낙 컬러풀해서 음악만 틀어놓으면 클럽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그런데 저 멀리 벤치에 앉아있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로 눈에 띈 이유는 할머니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였다. 마스크를 귀에 걸치고는 있었지만, 마스크는 턱 아래까지 끌어내려져 있었다. 마스크에 대한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할머니의 입에 물려있는 길쭉한 모양의 익숙하지만 낯선 무언가였다.




'설마... 담배?'




라는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스크를 뚫고 담배 냄새가 콧 속으로 들어왔다. 지하철 대기 공간이 아예 지상이라 밖이 뻥 뚫린 공간이면 그래도 이해할만했는데, 사방이 꽉 막히고 정말 '지하'에 있는 플랫폼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러니까 저 할머니는 담배를 여기서 마스크를 내리고 피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태우시는 애연가로 추정되었다. 흡연으로 보나 외관상 나이로 보나 고위험군인데,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마스크를 내리는 것도 모자라 흡연이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내가 잘못 본건가 싶어 두 눈을 꿈뻑이며 할머니를 바라보았고, 할머니는 마치 '뭘 봐, 아가씨.' 하는 도도한 눈빛으로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좀 뻘쭘해졌지만 할머니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는 것도 뭐했다. 나는 그대로 할머니가 앉은 벤치를 지나쳐 걸었다.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할머니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뭐라고 할머니에게 중얼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할머니와는 달리 할아버지는 착실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100% 전해지지 않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너무 놀라서  벌리고 토끼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할머니의 행동이 독일 노인을 모두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절하고 매너 있고 규칙을  지키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쿨한 할머니의 반항 아닌 반항(?)  충격적이었다. 어차피 멀리 떨어져 있을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어서 냄새를 피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저 정말 어지간히도 피우시고 싶으셨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주체가 할머니라서  마음이 관대 해지는 것도 같았다. 걱정도 되었다. 저러코로나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하지만 이미 할머니의 태도와 표정이 나는 그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하고 있었다.




만약 지하철역에서 담배를 핀 것이 할머니가 아니라 젊은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불쾌해하며 계속 그 사람을 노려보았을 것도 같다. 그런데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조금만 내리고 있어도 노려보며 눈치 주는 내가 왜 마스크도 내리고 담배도 피우던 그 할머니에게는 관대해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묵묵히 버텨내야 했던 그녀의 삶이 그 당당한 눈빛에서 조금은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지금의 이 도시의 모습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나를 당당하게 바라보던 할머니는 정거장에서 마음껏 담배 피우던 시절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몇 달째 계속되는 코로나 락다운에 대한 반항인 걸까.








할머니, 그래도 건강하시길 바래요.












글&사진: 노이

커버 사진: Photo by Alex Harvey ��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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