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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pr 07. 2022

외국어를 잘하려면 자신도 잘 알아야 한다



4월의 첫째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여름학기가 시작되었다. 한국과 달라도 너무 다른 독일 대학 스케줄은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오늘은 학과에서 제법 큰 행사가 있었다. 5학기, 그러니까 3학년 쯤 되면 교환학생을 가거나 인턴십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야한다. 둘 중에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이게 고민이 만만치 않다. 둘 다 각각의 장단점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미리 경험을 한 선배들이 와서 경험담을 나누고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년에도 열렸었는데 그 때는 무슨 말인지 정말 하나도 이해를 못한데다가, 줌으로 열려서 더더욱 집중이 안됐었다. 올해는 거의 2년만에 오프라인으로 학교 건물에서 열린 것이라고 한다.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하는 것은 답답했지만, 줌으로 듣던 것보다야 훨씬 훨씬 나았다. 오랜만에 보는 동기들의 얼굴도 반가웠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입학 때 했던 오리엔테이션 말고는 이렇게 큰 학과 행사가 오프라인으로 열린 건 처음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도 코로나 규정이 심해서 서로 거리두기를 엄청 지켰고, 앉을 때도 다 떨어져서 앉았었더랬다. 이번에도 마스크는 썼지만, 거리두기는 많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패널들이 앉아있던 의자





빠른 포기만큼 빠른 재도전


처음 독일에 왔을 땐 모든 게 정시에 칼같이 시작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곳도 있지만 함부르크는 좀 유한 편이다. 오후 4시 시작이라던 행사는 오랜만에 오프라인으로 만나 반가워 인사들을 나누느라 10분 늦게 시작했다. 신기한 건 한 공간안에 양쪽 벽을 모두 무대로 만들어서 두 개의 발표를 동시에 진행했다. 이게 좀 그럴 만큼 넓은 곳에서 한거면 모르겠는데 또 그렇게 큰 강의실은 아니었던지라 당황스러웠다. 모국어로 듣는 현지 학생들이야 어떻게든 이해하겠지만, 일대일로 대화해도 엄청 집중해야 하는 나에게는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패널들도 마스크를 쓰고 말해서 소리도 더 작았다. 그래서 첫 프로그램에서 두 개 패널이 동시에 진행될 때는 듣는 걸 포기했다. 꽤 빠른 포기였다.




'이걸 내가 알아듣는 건 불가능 하지. 안돼 안돼.'




안된다는 생각만,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만 머릿 속에 가득했다. 발표 내용 자체는 마케팅이나 매거진, 홍보 등에 관련된 분야에서의 인턴십 경험 공유라 정말 듣고 싶은 내용이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 프로그램은 교환 학생을 한 선배들이었다. 패널의 절반 정도가 개인 사정으로 오지 못해서, 이 프로그램만 유일하게 한쪽 무대만 사용했다. 그제야 조금씩 발표 내용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 동안에는 확실히 독일어 듣기가 많이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다음 프로그램에서 또 다시 두 개의 패널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또 포기가 재빠르게 날아와 내 마음을 달랬다. 괜찮다고. 이건 내가 못듣는게 아니라 '환경' 때문이라고 탓을 돌렸다. 그냥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찌나 다들 잘 집중하며 듣는지 주위에 딴짓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좀 더 마음을 다 잡았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관찰했다. 분명히 반대편 무대 패널 소리가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외국어라서 더 집중해서 단어를 캐치하고 이해해야 하는 능력이 마비가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살면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내가 '외국어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늘 조용하고 나를 배려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그래서 마음을 조금 바꿔먹었다. 나의 단점은 포기가 빠른 것이지만, 반대로 장점은 다시 일어서는 것도 빠르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런 상황도 익숙해 져야지. 수련이라고 생각하고 알아들으려고 노력이라도 해보자.'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의 문화 시설에서 일해본 선배들의 경험담 공유였다. 내가 매우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독일어 듣기 연습이라 생각하고 집중을 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살아있는 외국어를 들을 수 있다는 소중한 기회


대학을 들어오기 전 독일어 시험을 위해 열심히 독학하던 때였다. 학원을 다니면 좋지만, 학원비를 아껴보려고 제법 어려운 레벨을 독학을 했었다. 그 때에는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독일어 듣기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 미디어뿐이었다. 그 미디어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시험을 위해 내가 구매해야 했던 교재는 듣기 파일을 MP3가 아닌 CD로만 제공했다. 하지만 내게는 CD 플레이어나 CD를 넣을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그래서 어둠의 경로로 오디오 파일을 찾아헤매기도 했다. 독일인 친구는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독일어를 하는 친구가 있다고 해도 내 실력이 부족해 대화가 이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혼자 떠들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앞에서 라이브로 독일어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건 그 당시의 내가 정말 절실히 바라던 기회였다. 이런 행사에서는 교과서용이 아닌 살아있는 독일어를 들을 수 있고, 또 다수를 상대로 진행하니까 내가 100%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고,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 게다가 내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





그렇게 생각을 바꿔먹으니 신기하게도 귀가 열렸다. 조금씩이지만 내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웃긴 포인트에서는 같이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남들 웃을 때 못 웃는 슬픔은 생각보다 크다.) 역시 마음먹기 나름인 걸까? 독일어를 배우면서 유난히 더 느끼는 거지만, 언어라는 건 물론 기초를 배우고 지식을 쌓고 연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정 단계에서는 심리적인 요소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분명히 내가 배운 실력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임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또는 분명히 제대로 말할 수 있는데 사람들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는 상황을 수십번 반복하다보니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심리적 장벽을 제거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심지어 말하기에 있어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마도 올해의 내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나는 과연 나를 알고 나를 평가하고 있는가?


특히 이번 경험으로 새롭게 깨달은 건 쉽게 좌절하기 전에 '나를  알아야 한다' 것이었다. 지난 학기 나는 1학년 수업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이 두 그룹으로 나뉜다. 나랑 같이 들어온 동기 그룹 A 있고, 올해가 새내기였던  다른 그룹 B 있다. 그룹A와는 아예 독일어로 말하는  포기하고 영어로 친해졌다. 그게 습관이 되어 어느 정도 독일어를 하게  지금도 이들과는 자꾸 습관적으로 영어로 말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그룹B와는 영어를  시도했다. 그런데 어쩌다 시도해도 그룹B 영어로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룹B와도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친해지면 좋고, 게다가 독일어 연습을 하기도 굉장히 좋은 기회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한국어로 말할 때도 이런 그룹에서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는  정말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가엾게 여긴 멋진 분들이 먼저 다가와 주셨지만서도, 독일은 정서도 다른데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쉬이 어색해졌다. (지인의 조언으로는 독일 사람들도 누가 먼저 다가와주길 기다리는 타입이 많단다.) 원래도 붙임성이 없는데 못하는 독일어로 하려니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친해지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독일어 레벨업보다 당장 지금  마음의 평화가 우선이었다.



각자 일하는 회사의 소개 포스터를 붙여놓고 질답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내게서  다른 모습을 보았다. 행사  쉬는 시간에 자유롭게 발표자들에게 다가가서 궁금한 내용을 물어볼  있었는데, 무슨 배짱이 생겼는지 적극적으로 다가가 궁금한  이것저것 물었다. 회사 업무 분위기는 어떠냐, 돈은 얼마를 받냐, 너는 계속 거기서 일을 하고 싶냐 등등. 내가 너무 시간을 뺏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야기를 나눈 ,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 지금 독일어로  막힘없이 얘기를 나눈  같은데?' 처음으로 독일어로 대화를 주도한 경험이었다. 보통 외국어를 공부할 때, 특히 해외에서 공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조언하는 것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또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 방법이 맞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방법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이 방법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잘 해내지 못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내성적인 나의 성향을 자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특정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스럽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돌이켜보니 20대의 나는 새 친구들에게는 먼저 못 다가가도, 생판 남에게 전단지 나눠주는 건 잘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학  일년은 정말 절망 뿐이었다고 말할  있을 정도로 늘지 않는 독일어가 답답했는데, 그래도 나의 고군분투가  헛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제 나의 성향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성향에 맞춰 말하는 연습을  늘려가야겠다. 올해는 공부를 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방법도 사회의 잣대가 아니라 나의 기준에 맞추고 싶다.




ps. 행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학교 건물 안에 모여서 맥주를 마셨다. 너무너무 재밌었다. 맥주는 학과에서 무료 제공 :)

하지만 8시 반에 문닫으니 나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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