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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pr 01. 2022

3월의 마지막 날, 눈에 덮힌 봄꽃을 바라보며



내 방은 아침에 눈을 뜨고 고개를 조금만 들면 창밖 풍경이 보인다. 그래서 늘 잠에서 깨면 창밖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한국에서 자취하던 곳들은 대부분 창밖 풍경이 아름답기는 커녕 이웃과 서로의 사생활을 위해 가리기 바빴다. 그래서 이렇게 눈을 뜨자마자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담은 창문들이 보이는 지금 내 방이 너무 좋다. 비록 1년 중 대부분의 풍경이 회색 풍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잎이 나고, 녹음이 짙어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나무가 내 방 바로 옆에 있어서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 함께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흡’ 하고 숨멎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밖의 온 세상이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좋다 못해 숨멎는 소리가 난 이유는 난 눈이 너무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재밌는 걸 보지 않아도 얼굴에 피식피식 웃음이 번진다. 얼른 나가서 눈 쌓인 풍경이 보고 싶어 조바심이 든다. 이럴 때 조금만 있다가 나갈까 하고 늑장을 부리다간 금새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그러면 눈이 언제 녹아버릴지 모른다. 얼른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준비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진다.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패딩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건물 현관을 열자 마치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못한 채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넓고 큰 공원으로 갔었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일단 작지만 가까워서 자주 가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늘 보던 풍경이 더욱 화사하고 새로웠다. 어떤 여자는 신발을 양손에 들고 맨발로 소복이 쌓인 눈을 걸으며 짧고 강한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더 걸어가니 그네가 있는 아주 낮은 언덕에 아이들이 신이나서 썰매를 타고 있었다. 썰매가 그냥 내려갈 경사는 아니라서 한 명은 썰매를 타고 한 명은 썰매를 끌어주며 달려댔다. 반대편 평지에는 루돌프가 끌 것 같은 나무 썰매에 조그만 아이들 두명이 앉아있고, 아빠가 줄을 잡고 끌어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훈훈한 장면들이 소중해서 카메라로 영상을 찍고 또 찍었다.





조금 더 걸으니 요근래 따뜻해진 날씨에 잠깐 꽃을 피웠던 나무도 눈에 파묻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꽃들은 눈에 파묻히지 않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쌓인 눈에 참 춥겠다 안쓰러우면서도 그 모습이 예쁘다는 생각에 사진을 찍고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꽃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행복해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하지만 이 추위를 이겨내고, 수일 내로 이 꽃은 더 아름답게 다시 고개를 들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의 나도 이렇게 눈 덮인 작은 꽃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얇은 꽃잎 몇장으로 무겁고 차가운 눈을 버티면서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는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눈은 녹을 것이고, 추위를 이겨낸 꽃은 더 강하고 아름다워져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의 때아닌 폭설처럼 인생에도 뜻하지 않은 눈이 내린다.

요즘 내 삶이 그런 것 같다.

이제 제법 마음도 안정된 것 같고, 어렴풋이 행복도 알 것 같은데 여전히 어딘가 춥고 불안하다.

언젠가는 나의 눈도 녹고, 나의 꽃도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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