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썸 타기
독일에 오기 전까지 내게 썸이라는 건 꽤나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썸도 두 사람 이상 동시에 타는 법이 없었다. 썸은 그저 사귀는 관계까지 가는 과정 중 하나일 뿐, 썸을 타는 것만으로도 사귀는 것에 준하는 책임감과 친밀감이 따라왔다. 내 썸은 한 달 이상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며, 그 안에 어느 쪽에서든 사귀자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내가 독일에 와서 이 썸에 대한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독일 사람들은 썸에 대한 생각이 정말 많이 열려있다. 그리고 그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어떤 커플은 썸만 1년을 넘게 탄 커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내 지인 중에 썸만 2년을 타고 사귀게 된 커플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럼 그들이 그 1년, 2년 동안 서로에게만 마음을 주느냐면 또 그것은 아니다. 여기서 썸에는 어떠한 구속 관계도, 책임감도 없다. 이 기간 동안에는 관심이 가는 이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만난다. 썸을 타는 동안에 잠자리를 가지는 것도 서로의 동의만 있다면 자연스럽다. 몸의 대화가 잘 맞는지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니까. 만약 썸을 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자는 것이 걱정된다면, 직접 물어봐도 된다.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는 질투 때문이 아니라 ‘건강’을 염려해서라고 설득하면 대부분 이야기해준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만남을 고민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말자. 썸이 자유롭다는 것이 상대에게 무례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자유에는 늘 책임이 따르니까.
처음에는 썸에 대한 이 생각 차이가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앞서 말했듯 독일 땅을 밟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나는 유교걸이었고, 그래서 썸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썸이라도 나를 아주 가볍게 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벼워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중한 사람도 있었다. 사실 연애를 떠나서 독일 사람들은 (특히 북독일은) 친구 관계를 맺을 때에도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타입이다. 미국에서는 처음 만난 날부터 “Bro”를 외치며 10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인 듯 신나게 놀지만, 그 뒤에 그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지 여부는 랜덤이다. 대신 독일은 처음에는 좀 거리감이 느껴져도 시간을 들여 신뢰를 얻고 친해진다면 나중에는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잘 챙겨주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연애에서도 ‘연인’, 즉, 사귀는 관계가 되기까지는 시간과 신뢰가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말은 거꾸로 말하면 '연인'이라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 신중해지는 것 같다. 일단 사귀고 만나면서 서로를 알아가 보는 게 내가 한국에서 해오던 연애 방식이었다면, 독일에서는 반대로 썸으로 서로에 대해 최대한 알아보고 맞춰본 후 연애의 단계로 들어서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물론 성격 급한 내가 자꾸 독촉해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한 달안에 나와 사귀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연락하는 습관도 다양하다. 평균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톡을 더 자주 하는 건 분명하다. 독일에서는 하루 이틀 답이 없는 건 친구 사이에서도 흔하며, 많이 바쁘면 일주일 넘게 아무 말 없이 답이 없어 나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장문의 굿바이 메시지를 적어 보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바쁜 거였던 적도 있었다. 이런 고민을 옛 직장 동료 부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부부야말로 서로 완전 다른 연락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반대로 여자 쪽은 연락을 자주 안 하는 스타일이고, 남자가 연락을 자주 하는 스타일이라 남자가 서운해하는 중이었다 (둘 다 독일 사람).
아무튼 이런 점 때문에 독일의 연애관이 익숙하지 않은 채 독일에서 썸을 타기 시작한 한국 사람들은 내가 지금 어장 관리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상처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만날 때는 사귀는 것 같이 굴면서, 헤어지고 나면 연락이 느리거나 잘 없고,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 이럴 때 만약 내가 상대방에게 강한 확신과 감정이 있다면, 여자라고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저 사람이 답이 느린 걸 보니 나에게 관심이 없나 봐. 이만 정리하자.’ 한국에서처럼 상대의 행동 패턴만 보고 분석하고 결론 내리다가는 좋은 사람을 놓치게 돼버릴 수도 있다. 마음이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망설이지 말고 먼저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주의할 건, 내 마음을 표현하되 그 마음에 대한 대답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말고 늘 상대의 감정과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Joseph Frank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