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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Feb 04. 2023

박찬욱 감독과 독일 관객들의 9천 km를 뛰어넘은 대화

종종 독일 영화관에도 한국 영화가 개봉되고는 한다. 주로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걸리는 것 같다. 독일에서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챙겨서 보러 가는 편이다. 그러다 이번에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독일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 개봉일에 온라인으로 박찬욱 감독 GV까지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달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맨 앞자리까지 관객이 꽉 들어찬 상영관 (본인 촬영)




‘헤어질 결심‘의 독일 개봉 시간은 2023년 2월 2일 독일 시간 19시 15분이었다(함부르크 기준). 다른 도시에서는 19시에 개봉한 곳도 있다고 했다. 영화 제목은 독일어로 조금 다르게 번역되었는데 ‘Die Frau im Nebel’, 즉, ’안개 속의 여인‘으로 번역되었다. 예매를 하면서 조금 특이했던 건 좌석예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시간대 영화는 모두 좌석 예약이 가능한데 왜 굳이 GV가 있는 타임만 자유 좌석 선택제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찍 가야할 것 같긴 한데 얼마나 일찍 출발해야 할지 애매했다. 박찬욱 감독이 유럽에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과연 얼만큼의 사람들이 올지, 얼만큼 열정적으로(?) 일찍 올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영화 시작 30분전 쯤 되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우루루 몰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차곡차곡 사람들이 들어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90% 이상 자리가 꽉 찼다. 우리나라 기준 보통 크기의 영화관이었다. 혹시나 한국 사람만 오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체감 상 관객들의 70% 이상은 비한국인이었다. 최소한 함부르크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현지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그리고 감독과의 GV에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Albaton 영화관 앞에 걸려있던 독일 영화 매거진 표지에 소개된 모습 (본인 촬영)



‘헤어질 결심’에 대한 독일 관객들의 평점은 아주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10점 만점에 7-8점 정도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할만하다는 분위기다. 몇 개의 독일어 리뷰를 읽어보니 대부분 박찬욱 감독에 대한 팬심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아보였고 (특히 올드보이가 아주 유명해서 독일의 20-30대들도 본 사람이 제법 있다. 물론 내 체감상의 통계지만.), 아쉬웠던 점으로는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 전개 속도’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 마이너스 별점으로 작용한 듯 보인다.




‘헤어질 결심’ 독일 영화관 온라인 GV 모습 (본인 촬영)




약 2시간 20분 정도 되는 영화가 끝나고, 모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후, 스크린에 커다란 안내문이떴다. 화면 아래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떠있고, 가운데에는 GV 시작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떴다. 시작 시간이 되자 Frank Joung이라는 분이 모더레이터로 인사를 시작했다. ‘Die Halbe Kartoffl’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모더레이터라 자신을 소개했다. Die Halbe Kartoffl이란 직역하면 ‘반쪽짜리 감자’라는 말로, 한국인 부모 아래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자라 다문화 배경을 가진 그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타이틀인 것으로 보였다. (*독일 사람들이 감자를 워낙 많이 먹어서 외국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을 장난식으로 놀릴 때 ‘감자’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독일어로 진행될 것이라고 추측했던 내 생각과 달리 GV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모더레이터가 영어로 질문을 하면, 한영 통역가가 이를 박찬욱 감독에게 통역해주고, 박찬욱 감독은 한국어로 답을 하고, 그것을 통역가가 다시 전달해주는 방식이었다. 통역가분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여성분이었고, 아주 매끄럽게 통역을 잘 하시는 실력있는 분으로 Q&A 시간 내내 아주 큰 역할을 해주셨다. 약간 아쉬웠던 점은 모더레이터의 질문을 박찬욱 감독에게 영어에서 한국어로 통역하는 과정에서는 마이크가 꺼지도록 세팅을 해두어서, 그 시간 동안 오디오가 텅 비는 바람에, 그저 통역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찬욱 감독님의 다소 귀여운 바디 랭귀지에만 모두 집중을 하게 되서 작은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통역을 전해듣는 내내 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귀여운 박찬욱 감독님(?) (본인 촬영)





박찬욱 감독은 최근 차기작으로 드라마 <동조자>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 HBO에서 제공해준 LA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GV를 진행하는 내내 박찬욱 감독의 등 뒤로 집의 내부 모습이 배경으로 살짝 보였다. 꽤 널찍해 보이는 방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화이트톤의 깔끔하고 모던해 보이는 집이었다. LA는 독일보다 시차가 9시간이 느리다. 그래서 독일은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박찬욱 감독이 있는 LA는 오후 1시 정도였다. 촬영이 없는 날이라 오늘은 마음이 좀 느긋하다며, 시사회 시간 내내 특유의 차분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질이나 연결 상태, 오디오는 모두 깨끗하고 딜레이가 없었다. 전체 GV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동시 통역을 하다보면 통역에 걸리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통역하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약 30분 정도 되는 GV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실시간 통역을 통해 관객들과 박찬욱 감독이 대화하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해준과 서래가 스마트폰의 통역 앱을 이용해서 소통하는 장면과 오버랩 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는 AI를 통해 소통했고, 이 시사회에서는 전문 통역가인 사람을 통해서 소통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지만. 서래는 AI 통역기로 그녀의 한층 더 깊은 마음을 들려주고, 박찬욱 감독은 고급 통역가를 통해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AI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바디 랭귀지가 필요한 장면에서 서래가 통역의 흐름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것처럼, 통역사가 박찬욱 감독의 답변을 영어로 옮기는 동안 강조가 필요한 부분 마다 감독은 강조하듯 한번 더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사실 영화에서 사용한 통역 앱은 실제 존재하는 앱이 아니라고 했다. 그 정도로 한국어, 중국어를 통역해주는 앱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통역된 부분도 대사를 짜서 따로 녹음한 장면이라고.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일부는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라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지만, 나는 따라 웃으면서도 그 답변이 꽤 진지하게 내 머리에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왜냐면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저만한 기술이 되는 앱이 없어 따로 통역 녹음을 해야했을 지언정 박찬욱 감독이 몇 년 내에 만들어낼 새 영화에서는 더 이상 따로 녹음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또는 영화 후반부에서 해준이 서래의 스마트폰에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듣다가 일시 정지를 하고 다시 재생을 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장면을 보여주며, 버튼이 눌릴 때마다 화면을 멈추고 다시 이어가는 장면도 단순히 ‘창의적인 영화적 연출’이 아니라 먼 미래에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으로서 현실화 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약  한 시간 남짓되는 이 온라인 GV가, 즉,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모인 관객들이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모여, 미국에서 차기작을 준비중인 박찬욱 감독과, 9시간이라는 시차와 9천 km를 뛰어 넘어, 실시간으로 질문 답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이벤트’야말로 한참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공상 과학적인 장면일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귀엽고 발칙했던 독일 관객들의 질문과 박찬욱 감독의 답변 몇가지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아래부터는 GV 중 오간 질문 답변 내용 중 일부)


Q. 최근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등 한국 작품들이 글로벌하게 흥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피(a lot of blood)’가 없이 흥행하는 작품은 나올 수 없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많은 피 부분은 농담식으로 표현한 것)


A. 기생충은 그렇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아, 마지막 장면은 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헤어질 결심‘은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분들에 따라서는 마지막 장면이나 일부 장면을 잔인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반대로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왜 해외 관객은 한국 영화에서 폭력성을 기대하는지 말이죠. 제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00년대에 해외에서 Asian Extreme이라고 해서 폭력성이 강한 한국 영화 위주로 배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한국 영화는 폭력적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영화들 중에도 폭력성 없이도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가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영화들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을 것 같고,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영화도 저런 영화도 모두 만들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Q. 영화에 나온 자라들은 모두 괜찮나요? (관객들 모두 웃음)


A. 하하, 네. 모두 안전하게 다 잘 살아있습니다. 영화에서 형사가 발로 찬 자라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자라입니다.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Q.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의 자연 풍경을 많이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촬영지는 모두 한국 배경이었나요?


A. 네,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제 이전 작품인 ‘아가씨’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아가씨’의 경우 주로 세트장 촬영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번 작품 ‘헤어질 결심‘에서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장소를 기반으로 야외의 풍경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CG를 좀 사용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요. 촬영지는 모두 한국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씬에서 보신 바다는 세 군데의 해변을 촬영하여 한 해변인 것 처럼 편집을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저렇게 생긴 해변은 한국에 가도 없다는 점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웃음)



Q. 영화에서 ‘안개’라는 노래가 등장하는데, 이 노래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A. 사실 제가 노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노래가 저를 선택했다고까지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로, ‘안개’라는 노래로부터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런던에서 ‘리틀 드러머 걸‘을 작업하던 시기에 향수병이 생겨 유튜브에서 추억의 한국 노래를 많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때 이 ‘안개’라는 노래가 뇌리에 깊이 남았고, 이 노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출처: Plaion Pictures(독일 독립 영화 마케터 회사)에서 준비한 영화 ‘헤어질 결심’ LIVE Q&A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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